물리 이론을 회화로, 회화 이론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만든 1000일 수행
물리 이론을 회화로, 회화 이론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만든 1000일 수행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4.05.10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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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선과 소리선은 구도자적 수행으로 무한과 영원을 그린 우주의 연금술“
김갑진 화가
김갑진 화가

4월 10-16일에 걸쳐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개최된 김갑진 개인전은 <연금술-빛선과 소리선>이자 “수학과 양자물리, 철학을 회화로 풀어 해석하다”라는 친절한 주석까지 달린 새로운 우주 회화론이다. 그가 불교의 무량(무한)수와 성단의 색인 울트라마린-만다라블루로부터, 빅뱅의 온도로 열화된 색이자 이를 아우르는 하늘의 검정, 현(玄)이 내는 빛과 소리의 선 작업을 완성해 내기까지는 꼭 1천 일이 걸렸다. 전부 신작이자 예술과 대척점에 있는 수학, 양자물리, 철학의 크기, 범위와 개념을 회화로 풀어낸 이번 개인전은, 무도 유도 아닌 공의 세계가 성립된다면 존재는 공(空)과 양립 가능함을 흥미롭게 풀어나간 일종의 수행이기도 하다. 

보라. 저 깊은 우주를. 저 검정(玄)이 공허와 무(無)가 아닌 이유를

검정. 태초의 색이자, 지난 4월 8일 북미를 환상적인 어둠으로 가로지른 개기일식의 색이며, 3원색의 교집합 겸 온갖 색들이 섞인 종말이자 궁극의 색이다. 궁극의 영원성을 지닌 우주원리, 만다라에 울트라마린블루를 입혔던 김갑진 화가는, 3년 만에 개최된 개인전에서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 ‘존재론에 대한 영원성과 무한성의 의미’를 그려내고자 공간표현인 우주를 택했다. 그림도 구도자적 수행이기에 불교로부터 접점을 찾기도 한 그는, 고대 이집트에서 중세를 거쳐 화학과 신소재 영역까지 발전한 ‘연금술’에 이번 메시지를 담게 되었다고 한다. 김 화가에 따르면, 물질을 금으로 만들고자 수학과 철학의 온갖 지식이 융합되었던 연금술은 ‘입자의 변환’이라는 개념에서 선 하나를 하나의 입자, 숫자로 간주하며 하나의 원자, 세포로 치환하고 중첩시켜 어떠한 오브제를 이뤄나가는 그림 작업과도 닮았다고 한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그는 무량의 조각과 파편들이 연속된 실금처럼 어우러져 결을 이루며, 흩어지고 결합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현상을 이루는 모습들로부터 우주를, 존재를, 실체를 각각 보았다. 우주의 근원은 어둡고 작게 응축된 검은 점에서 나오고, 여기서 연금술사들이 동원한 모든 원소가 탄생했으며, 사람은 수천 년에 걸쳐 원소를 융합하고 분해하며 금을 희구하려다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공(空)의 간격을 채우고자 그가 시도한 것은 ‘빛선과 소리선’을 이루는 무수한 붓질이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들어가며 연금술의 미시와 거시세계의 작동방식에 따라 형상들을 펼쳐낸 것이다. 과거 시를 쓰는 철학자들이 연금술을 위해 온갖 원소들의 이름을 붙이고 성질에 따라 공식을 매겼듯, 화가인 그는 수학의 더하고 빼고, 분해하고 합치는 개념을 선을 쌓고 잘게 쪼개며 합치는 미술기법으로 은유한다. 또한 오랜 사색을 거쳐 “우주의 시공 자체가 연금술”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그림을 매개로 연금술사들의 오랜 행렬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가 얇은 선의 무수한 집합을 나타내는데 보낸 1000일에 걸쳐, 작은 원자가 결합되고 분자로 뭉쳐 물이 되는 물리학의 법칙은 총 39개의 캔버스에 전개되어 이번 <연금술-빛선과 소리선> 전에 펼쳐진 것이다.

회화로 해석한 수학/양자물리/철학, 무한한 파편이 된 우주에너지

그림의 기본을 선으로 본 김 화가의 시각으로 볼 때, 물질의 기본을 입자로 본 과학이론은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수메르, 마야인들이 모두 ‘선’의 형태로 그린 1의 개념을 무량의 분자로 바꿔 캔버스에 유성우처럼 흩뿌린 그의 그림은 물질의 기본을 입자로 본 과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앞에서 보면 선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성단의 구조와 우주의 팽창/수축을 닮은 그의 그림은, 물질과 파동으로 이뤄진 분자들의 현상으로 보는 과학 이론을 색채의 공간에서 표현한 연금술이다. <연금술 red, yellow, blue> 시리즈는 존재의 투영을 원색으로 표현하며, 선이 타원과 면으로 화(化)하는 궁극의 선, 대립되는 극상이 탄생하는 현상을 화폭에 그려낸 것이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 태어난 성단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이때 태어난 원소들이 연금술의 재료가 되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그의 의견은 <유희(Grey)>라는 한 장의 그림으로 요약된다. 

그 어둑한 현의 세계에서 암순응(暗順應)된 그의 눈은 불확정성과 비국소성 때문에 오히려 혼돈과 질서, 결합과 분해, 생성과 소멸 같은 역설이 공존하는 우주의 연금술을 세세히 보았다. 갓 태어난 성단 같은 무늬로 우주를 규명하는 빛선과 소리선의 파편들은, 그가 남긴 “낮에는 태양빛을 머금어 신화를 만들고, 밤에는 달빛에 스미어 전설을 만든다”는 속삭임처럼 신비하고 위대한 형상을 응축해 냈다. 그는 이렇게 숱한 선과 몽롱한 층위로 물리적으로는 우주를, 시공개념으로는 화엄상의 구조와 인드라망의 구조를 회화적 언어로 표현한다. 이 무한과 영원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물리적 변환, 현상적 상황의 전개 과정에서 고독하게 방랑하는 화가이자 연금술사는, 우주 먼지처럼 작은 존재인 자신에게 화답하기도 한다. 짙은 어둠 속 고온의 성단을 닮은, 테레빈향의 푸른 광채를 그려 낸 ‘ignoramus(무지렁이)’로 그는 라틴어 철학자들처럼 “모름을 인지했기에 진리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는 깨달음도 보여준다. 이 해탈은 미지의 존재도 긍정하기에, 그의 우주의 연금술 이론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채도 낮은 검정을 탐색하던 화가 로스코가 결국 캔버스 위에 붉은 단말마를 남겼고, 우주가 ‘영원의 어둠’임을 꿰뚫어 본 눈이 끔찍한 결말을 맞은 스티븐 킹의 소설 <조운트>에서 보이듯 서구권에서 종종 우주-현(玄)의 비정형과 반복은 고독을 넘어 공포의 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화가처럼 무한의 물질과 파동의 영구한 반복으로 그린 현의 층위는, 그와 비슷한 파동과 에너지 주파수를 잡게 된 이들에게 이퀄라이징 잘 된 잠수부나 완벽히 차폐돼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우주인의 설렘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드러낸다. 마치 개기일식이 한 때 막연한 멸망을 뜻했으나, 근대 과학이 현상으로 인식한 후부터 글로벌 이벤트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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