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동하는 생명의 소리들이 빛에 인접하여 눈을 뜬 기하학적 조형회화
율동하는 생명의 소리들이 빛에 인접하여 눈을 뜬 기하학적 조형회화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9.05.17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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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주영 화백

“날실과 씨실처럼 짜인 빛이 40년을 공명(共鳴)하니, 그 파장의 하모니가 보기에 아름답다”

 

 [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2019년 4월, 블랙홀은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의 가설이 생긴 지 100여 년 만에  빛의 실제형상을 인류 앞에 드러냈다. 한없이 깊고도 어두운 무한 중력의 공포를 덧칠하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빛의 소리로 연주된 그 위대한 공명(共鳴)이 깊은 어둠마저 뚫고 수 천 개의 은하를 건너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서양화가 이주영 화백은 점·선·면의 질서를 추구하는 옵티컬 조형회화로서, 자신의 모토인 ‘들리는 그림과 보이는 소리’라는 개념의 이데아를 실현한 빛과 소리의 선구자이다. 과학이 중력의 압도적인 흡인력을 검게 칠하여 보여주었다면,  현대미술의 후예 인 이 화백은 빛과 소리의 앙상블을 다루며 시야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소리가 공명하는 울림과 반사된 하모니를 혼합해 영상에 옮김으로써 100년 후의 미래의 미술을 미리 보여준 이 화백이 창조한 지난 40년간의 공감각적 세계를 둘러보자.

 

 빛을 보여주는 소리, 소리로 화답한 빛 사이의 앙상블을 세련되게 시각화한 40여 년

생명과 자연의 상징성을 뜨거운 추상으로 완성한 칸딘스키와 보이지 않는 요소를 초현실적인 큐비즘 아트로 해석한 클레에게는 소리의 요소를 색과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후반부터 점·선·면 그리고 색으로 빛과 소리를 캔버스 위에 시각화해 온 서양화가 이주영 화백은 화가들이 주로 산수(傘壽)전을 연다는 두 번째 불혹을 앞두고, 그림을 슬라이드 영상으로 편집해 옮기는 혁신적인 과정을 공개해 화제가 되었다. 이 화백의 ‘빛과 소리의 앙상블’ 4부작은 10여 년에 걸쳐 4백여 개 그림을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어 여러 대로 겹친 영상들을 다시 촬영해 30분 러닝 타임으로 구성하고 편집한 역작으로 한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에 13회에 걸쳐 소개된 바 있다. 이 화백은 Ray Linch의 앨범 <Deep Breakfast>에서 발췌한 곡들의 리듬에 맞춰 그림의 오버랩과 웨이브, 페이드아웃 기법을 활용한 영상 <회화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회화로>에서 평면적인 그림들에 투사한 배음(倍音)과 공명(共鳴)이 생생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또한 이 화백이 소리의 진동과 시각화로 활용한 소재 중 유명한 것은 이 공명을 활용한 <풍덩>이라는 작품으로, 연못에 던져진 돌들의 여러 파장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또한 ‘빛이 있으라’,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성경의 창세기 1장 3,4절을 6백호 규모로 풀어낸 <오, 환희I>은 피아노 건반과 같은 선으로 소리를 은유하고, 중심의 태양과 양쪽의 위성으로 광활한 우주의 세계관과 진공의 어둠 속 빛을 표현한 대작이다. 그림을 종·횡단으로 잘게 잘라 씨실과 날실처럼 이어붙인 정교한 작업을 통해 원의 파동, 그리고 빛의 그라데이션이 모두 표현된 이 그림은 이 화백이 가장 아끼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빛I>은 원과 선, 물 위의 파장과 위성을 닮은 오묘한 공명의 그라데이션이 인상적이며, 2002년도에 발간된 중3 미술교과서에 2페이지에 걸쳐 수록되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이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음악과 미술의 공통요소를 서로 조화시키고 평면회화를 영속적인 공간에 옮기다

소리의 시각화와 대자연과 우주가 들려주는 생명의 소리에 대한 테마들은 소리를 캔버스에 잡아두기 위한 음악 애호가이자 뛰어난 아마추어 테너이기도 한 이 화백의 공감각적 작업에서 탄생했다. 음악을 전공하려다 화가가 된 이 화백은 컬러링의 표현법을 연구하는 것도 일종의 작곡이며, 그림을 오리는 작업도 교향곡과 협주곡의 여부를 결정하는 편곡과 유사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스테레오 오디오의 돌비 디지털 채널처럼 소리의 강약을 시각화 한다든지, 음악에 맞춰 쏟아지는 분수의 물, 타이핑의 조직적인 생활소음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공의 모든 소리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이 화백은 다양한 음악의 선명성을 색으로 옮기는데도 천착한 바 있다. 일찍이 추상화에서 조합이 난해한 삼원색의 밸런스를 세련되게 묘사한 로스코와 미로처럼, 이 화백도 음악의 리듬과 하모니 요소를 도입해 <오방색과 아리랑 환상곡>에서 원색들을 한 화면 안에서 세련되게 조합하기도 했다. 한편, 종이를 잘게 잘라 붙일 때 길이와 너비에서 1mm의 결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예민하고도 치밀한 작업 방식을 지닌 이 화백은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는 대로 다음 작품에 반영하기 때문에, 이 스타일을 유지하는 40년을 포함해 지난 60년간의 미술 활동 중 창작 아이디어가 고갈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 화백의 세계관에는 어느 우울한 날 인천의 바닷가에서 만월 아래 들려 온 드뷔시의 선율에서 모티브를 얻은 <달빛>, 거문고의 소리와 여섯 현을 형상화한 <거문고 산조>처럼 빛과 소리가 콜라보 된 작품에서 보이듯 시각적 요소를 영속적인 감성의 공간으로 옮기는 뛰어난 일면도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과 파문들에 음률과 색을 입히듯,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반영하고 싶다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비롯한 단체전에 20여 회 참가했으며, <빛과 소리의 앙상블>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송도 스카이파크, 미국 L.A Laca갤러리 등에서 총 12차례에 걸쳐 소개하며 배음과 공명의 철학을 실현한 이 화백의 그림들은 파리 구스타프 화랑, 대전 시립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울 시립 미술관, 청담 63갤러리 등 다수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절도 있고 명쾌한 추상의 ‘옵티컬 아트’로 명명되기도 하며, 조형과 기하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파노라마적 색채 회화 등 창조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 화백은 단국대 서양화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최근 제자들과 함께 입체조형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마치 베를 짜고 편물을 직조하듯, 트위드 재킷을 닮은 오묘하고도 세련된 순열조합 모자이크 패턴으로 정교한 앙상블 대작을 만드는 이 화백은 앞으로도 음악과 소리, 빛과 소리, 그림과 영상을 비롯한 모든 소리를 모은 흔적을 캔버스에 배치하고 영상화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이 화백은 지난해 3주에 걸쳐 진행된 압구정동 윤당 Y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서양과 한국의 음계의 차이를 각각 색으로 표현할 만큼, 여전히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이 화백은 빛이라는 필터로 소리를 해석하는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해답을 찾게 된다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영상작업으로 다듬어 빛과 소리, 공간이 어우러지는 전시장을 찾아 만족스러운 결과물의 스펙트럼을 보여 줄 것임을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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