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와 유화, 일련번호마다 새겨지고 밀착된 깨달음의 미학
판화와 유화, 일련번호마다 새겨지고 밀착된 깨달음의 미학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1.12.15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업의 자서전인 전작도록 발간 후로도 나의 변화와 도전은 이어진다”
홍재연 화가
홍재연 화가

한국 현대미술계 석판화 분야에서 길이 기억될 이름, 홍재연 화가는 깨달음이라는 소재와 <부도> 연작으로 석판화와 아날로그 프린팅을 통한 구도자적 작업으로 오래도록 유화와 판화의 다양한 변주를 보여 왔다. 그가 경기대 미술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2년 후인 2015년, 자신의 작품 1,200여 점을 모은 전작도록(카탈로그 레조네)을 출간하며 왕성한 창작력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지리라는 예측이 무색하게, 수년 째 그는 유화물감으로 석판화를 시도했던 청년기적 도전의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재료상의 고민을 딛고 자연과 인간의 정신성, 생불과 부도에서 얻은 깨달음의 흔적으로 비구상의 시대정신을 소위 ‘서법적 추상’으로 접근시킨 그는, 철학적 욕심 없이도 시간의 흐름과 생활의 지혜로부터 얻은 깨달음의 추상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새로운 수단에 도전하는 중이다. 

부도 시리즈와 비구상유화, 석판화 오가는 창작자의 오롯한 흔적

1947년 생 홍재연 화가는 지난 50여 년 간 개인전 44회를 거치면서 선과 색의 정신성, 30여 년 간의 한국 판화미술사의 개척자로서 보여준 추상의 대안을 자신의 대다수 작품을 수록한 전작도록에서 충실히 보여준 바 있다. 구상보다 비구상과 추상에 흥미를 느끼고, 유화를 하면서도 판화, 그 중 난이도 높은 석판화를 개척한 세대인 그는 원재료조차 구할 수 없는 소재의 난관과 영문 석판화 교본, 그리고 한본어 일색인 인쇄소식 언어라는 2차 관문을 차례로 넘으며 소통과 협력으로 척박한 국내 석판화 분야를 개간해 나갔다. 그래서 김병수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컨템포러리 아트가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서 유동할 때, 그의 예술은 프리모던과 모던을 접속시키며 낭만주의 대신 논리와 이성, 정신성을 수리적 질서를 빌려 표현했다”고도 한다. 

또한 회화와 판화가 공존하는 홍 화가의 작품구조는 종종 고분벽화나 고대 천문도 혹은 일월성신도에 비견된다. 그의 생각의 틀이 인체의 비례보다는 자아의 성찰과 정신적인 면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판화예술의 조상격인 팔만대장경에 비유되는 본격적 선면의 분할과 조합, 군집의 느낌을 담은 화면구성, 장대한 규모의 캔버스 대작이 보여주는 웅장함의 질서는 생각의 일련번호로 된 연작들로 꾸준히 발표되며 작가적 성찰의 깊이와 성숙도를 입증하고 있다. 이렇듯 숱한 선택과 집중의 시간으로부터 석판화의 난해한 밀착감을 구현하는 과정이 그의 판화작품의 질감을 더한층 높였으며, 주제 면에서도 유화의 미니멀아트 조류를 따르다 자연의 소재에 눈을 돌려 마침내 인간의 정신성에 다다른 그는 ‘생불’과 ‘부도’를 오방색이나 불교미술이 아닌 명상과 깨달음의 관점으로 해석하게 된다. 

생불과 부도로부터 받은 인상을 일상에서의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홍 화가의 자발적이고도 작가적인 주제의식은 시기별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터닝 포인트를 계기로 급변한다기보다는 무르익어가는 내면 성찰과 지속성의 연계에 가깝다는 점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공주에서 접한 승려의 생불과 구도적 삶을 소박한 석재로 형상화한 묘탑인 부도를 본 뒤, 홍 화가는 여기서 받은 인상을 10년 이상 무의식적으로 간직하다가 흔적과 남겨짐, 깨달음의 미학으로 나타낸다. 그는 이를 “구도자의 흔적이 이끼 낀 부도에 머문 장면을 형상화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생각의 갈무리가 차츰 작업을 통해 배어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작업과정은 형상의 재구성이나 복제인 구상보다 비구상에 욕심을 보인 그의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부단한 내면의 수련이 사리로 나오는 과정처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을 유화나 판화를 통해 숙성시켜 내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흔히 많은 창작자들이 불교미술에서 불화소재를 빌려오다가 현학적인 찬연함에 압도되어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케이스가 많은 반면, 그의 작품은 종교사상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판본의 글자가 종이로 이식되는 인쇄원리처럼, 그가 나타내는 종교적 사상과 깨달음에서 분리된 소박한 일상의 깨달음은, 생활의 지혜에서도 미술적 기법으로 추상화시킬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점성 없는 유화물감으로 석판화 기술을 습작한 그의 노력이 소재상의 변화를 한계상황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처럼 기하학적이지만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그가 논한 인간의 정신성은 언어의 벽과도 무관하여, 그의 작품들은 서울시립미술관과 영국 대영미술관, 중국 흑룡강성미술관, 프랑스 AMAC미술관, 주 스위스한국대사관 등 세계 각국에 소장되어 있다.

‘깨달음의 미학’을 판화와 천, 캔버스로, 같은 주제의 다양한 표현 지향

홍 화가는 요즘도 이러한 ‘깨달음의 미학’을 선보이는 창작에 몰두해 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요약 대신 전작도록으로 남긴 홍 화가는 이처럼 흔적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기질이 흉내가 아닌 ‘창작’을 강조하는 성향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모사와 흉내에서 창작이 도출되면 괜찮지만, 변화 없는 자기복제로 남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그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장으로서 독학으로 판화를 마스터하며 석판화를 발전시키던 시절과 중/고/대학 교직생활 34년 내내 이 점을 후학들에게 강조해 왔다. 덕분에 그는 색의 ‘접붙이기’ 같은 형상이 전작도록 발간 이후로도 정체되지 않고 서서히 달라져 가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사람 키만한 캔버스의 연결 형태를 규모 면에서 사뭇 웅장하게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그는, 한동안 발 디딜 틈 없이 쌓여가는 캔버스들을 따로 보관한 후 새로운 작업 공간도 확보했다고 한다. 

이렇게 새로운 작업에 들어간 그는 여전히 깨달음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표현방식에 있어서 특정한 경지나 완성된 형태에만 집착하진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겨울에 시도하기 어려운 판화작업 대신 창작 욕구가 일 때마다 바느질 기법이 들어간 천과 캔버스 작업으로 보완 중이다. 그는 방법론의 연구에 대해서도 “바위산에서 떨어지는 돌은 처음엔 모나지만 계곡을 흘러 강에 도달하면 둥글어지고,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자잘해진다. 사회생활도 그렇게 편안하게 가는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소재와 형태의 변화는 수단일 뿐, 주제의식까지 변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며, 이러한 자신의 깨달음의 미학이 조금이나마 전달된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피드백일 것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늦어도 내후년 3월 경, 홍 화가는 이 새로운 성찰을 겸재 정선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다시금 선보일 예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