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 200℃의 열기로 농익은, 지상의 화려한 기억을 모은 세라믹 그림
1천 200℃의 열기로 농익은, 지상의 화려한 기억을 모은 세라믹 그림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2.12.13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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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안 화학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도자 색처럼 새롭고도 입체적인 놀이”
세라믹 전문 아티스트 혜라 작가
세라믹 전문 아티스트 혜라 작가

꽃배산 2길의 모돈갤러리는 글 쓰는 도예가 겸 화가인 혜라 작가와 펜화 작가 겸 건축가, 테너인 윤희철 교수 부부가 만든 융합예술의 산실이다. 이들의 파트너십은 ‘모돈’에서 알 수 있듯 본래 모돈장이었던 장소로부터 가곡의 선율과 벨 에포크적 감수성, 기둥 없이도 지붕을 떠받치는 건축양식을 읽어내고 지금의 명소로 개조한 아이디어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모돈갤러리의 공동대표이자 30여 년 경력의 도예가로, 나아가 순수예술과 생활예술을 아우르는 세라믹 아트 작가로 개인전과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혜라 작가는, 현란한 큐브도트 타일을 굽고 미디악보 같은 콤포지션, 태피스트리 같은 평면을 표현한다. 점토가 도자의 소박함에서 점점 화려해지고 화투의 꽃놀이패처럼 즐거운 놀이 한 판을 벌이는 혜라 작가의 세라믹 그림. 그 숱한 조각들과 색깔 속에는 이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파괴는 창조의 전제조건, 조각 난 행위를 소성해 만든 영원의 빛

홍익대 미대, 동 산업미술대학원에서 도자를 전공한 혜라 작가는 반월아트센터와 아산병원갤러리, 모돈갤러리와 성남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치르고, 아트쇼와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다. 올해 그가 서울정원박람회에 소개한 세라믹정원 가구들은, 소파를 현란한 세라믹타일들로 채워 유니크한 오브제를 원하는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포천 영평팔경 금수정과 티베트불교 고산마을 라다크 같은 문명의 가치를 마음에 담아 머릿속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혜라 작가는 “눈을 감고 물의 냄새, 옷자락 같은 바람의 촉감을 느끼는” 공감각 콤포지션에 강하다. 그의 세라믹 그림은 평면에서 렌더링 돼 조각 난 큐비즘과는 다르다. 도예가라 입체를 추구하지만, 정적인 구형 실물보다는 100호 규모의 캔버스 위에 화려한 도자 조각들을 자개/타일처럼 배치하는 그의 작품은 물속 자갈처럼 자유롭지만 뗀석기 유물이나 나비표본처럼 규칙성을 갖고 있다. 

도자는 완전한 소성이 아닐 때 파괴되는 숙명을 갖고 있지만, 반대로 혜라 작가의 오브제인 도자 조각들은 작품을 이루고자 처음부터 조각난 형태로 태어나 캔버스라는 요람에 오른다. 또한 자연을 예술의 근거로 삼은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형태의 분해와 분석보다는 생활 속의 미술을 시도했으며 대상의 아름다움을 모자이크하듯 배합한 플뢰게의 타일 패턴에 더 가깝다. 색상 톤도 그의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로, 클림트는 사각 패턴에 ‘영원의 빛’인 금으로 황홀함을 표현했지만 혜라 작가는 물감 대신 세라믹에 800℃에서 빛이 살아나는 수금(水金)을 칠해 소재 상 ‘영속성’의 의미를 더한다. 또 소성 과정에서 점토로부터 신비롭고 예측할 수 없는 색을 낳는 광물 유약은, 마치 “낳아야 아이 얼굴을 알 수 있듯”, “포춘쿠키를 깨듯” 가마를 열 때마다 그에게 창조행위의 설렘까지 준다고 한다. 

현대미술의 마띠에르 개념은 다양, 불/유약/흙이 만든 평면 위 입체성

현대미술이 평면의 입체화를 지향하는 요즘, 혜라 작가는 “다양한 시도를 해야 작가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간단히 정의한다. 세상 밖에서 영감을 얻는 세라믹 작가, 혜라 작가는 2004년도에 남이섬에 들어가 세라믹 타일링 작업으로 벽화와 외벽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지금도 설치보다 평면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이유도 바탕에 조각을 배치해서 새롭지만 안정된 요소를 만들기 위해서다. 또 평면에서 물감으로 마띠에르 효과를 내는 것은 재료도 많이 들고 어렵지만, 세라믹으로 표현하면 ‘입체성’은 오히려 질감 표현보다 넘기 쉬운 벽이라고 설명한다. 세라믹은 일반 그림보다 저장이나 소재 안정성이 좋기에 전시작가로 활동하기에도 적합한 장점이 있다. 단, 이러한 세라믹 작업에서 초기 작업인 가마 속 불과 유약과 흙의 밸런스를 맞출 때는 매우 노련한 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도예가의 멘탈은 화가처럼 머릿속에 떠오는 것을 색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보다 예측 불가능한 요소와 싸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다. 후자인 혜라 작가도 갇힌 상식을 깨고 하나의 도자형태보다는 도자로 화려한 꽃놀이, 화투와 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데 흥미를 느끼기에 가마에 넣어 나오는 색을 최대한 무수히 만들어 놓는다. 희끄무레한 광물질 유약들이 화학반응으로 용융 되어 온갖 색으로 나오고, 광택도 질감도 다른 그 수많은 조각들 중 끌리는 것들이 그의 작품 소재가 된다. 세라믹은 비움과 완벽한 형태의 작업이나, 그는 유일한 도자 오브제 한 개를 빚기보다는 온갖 작은 파편들로부터 갇힌 상식을 깨고 화려한 지구를 가득 채우는 이야기들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세라믹 조각은 질감과 계절, 수분감에 따라 깨어지는 결이나 모양, 촉감도 다르고, 다양한 물리력을 거쳐 평면에서의 2차 가공을 마치고 이질감 없는 얼굴로 세상에 나온다. 

태양빛의 축복 받은 색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지구 속 세라믹 놀이

사실 재료를 만든 후 다시 수천, 수만 개의 자잘한 세라믹 조각들을 맞춰 조화를 이뤄내는 작업은 작가의 표현처럼 아이를 아홉 달 품는 것처럼 고된 일이다. 또 ‘체스를 두듯’ 숱한 수를 읽어가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진공상태에 도달해야만 손을 뗄 수 있다. 하지만 고대 문명지마다 출토되는 토기 조각을 닮은 조각편들을 배치하는 이 격렬한 진공상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매우 경쾌하며 즐겁다. “차곡차곡 네모난 형태로 쌓아올린 인간적 정성의 모듈”이라 설명하는 혜라 작가는 색과 빛이 태양에서 받은 지구의 축복이기에, 종교를 초월해 화엄경의 장엄한 화려함, 실크로드 사행길의 티벳불상들과 현지의 삶을 보며 세라믹 작업을 변화시킬 영감도 얻었다고 한다. 

광릉숲예술인공동체, 수목원가는길 작가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혜라 작가부부가 복합예술공간 프로젝트를 구상했다가 코로나가 터져 답보상태가 되었을 때,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윤 교수와 함께 그는 20년 묵은 돈사를 방문하고 영감을 얻어, 이 모돈장을 예술의 산실청인 모돈갤러리로 바꾸고 지난 5.28-10.29 <포천드로잉축제>라는 릴레이 이벤트를 성사시킨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도 그의 열린 창작행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가 프로젝트를 10년 이상 경험한 그는 윤 교수와의 파트너십으로 드로잉 작가전과 전시작가 특별전을 비롯해, 오페라와 피아노, 중창단과 앙상블, 그리고 미술과 시가 어우러지는 토요예술무대를 열어 공연예술가들의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한편, 혜라 작가는 내년 1월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특별전>을 앞두고 있다. 평면이지만 입체성으로 조직된 그의 작업은 100호 내외의 대작 위주로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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