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의 기본기로 움터 올라 심상 예술로 만개한 운정체와 운정문인화
선(線)의 기본기로 움터 올라 심상 예술로 만개한 운정체와 운정문인화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2.05.13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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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문인화와 서법으로부터 현대 서체 개척한 국내 서예 분야의 명장”
운정 박등용 선생/서예가/운정서화실 원장
운정 박등용 선생/서예가/운정서화실 원장

서궁에 은거하던 정명공주가 십대의 어린 나이에 한석봉의 두툼한 중봉과 담대한 필치를 체화한 ‘화정(華政)’의 일화에서, 우리는 손끝 휘지만으로 마음 속 운봉을 이루며 기개의 빗줄기를 담는 명필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본다. 고금의 명필을 숙련해 필법을 다진 후에, 뜻한 바 있어 입체적인 서법의 절주감과 캘리그래피의 유연함을 결합한 서체인 ‘운정체’를 개발한 운정 박등용 선생에게는 “장단에 춤추는 한글 필기체의 창시자”에 어울리는 기백이 있다. 전통적 산수화와 서체의 ‘온고지신’ 식 현대화 사조 중에서도 미점법의 점묘와 대비되는 청아한 획의 선묘를 통해 자신만의 운정체와 운정문인화를 만개시킨, 국내 서예/문인화 분야의 대가 운정 선생의 작가주의를 꽃피우는 근간은 선(線)의 기본기에서부터 나온다.

묵의 선이 동서양의 조화로 춤추는 서예 캘리그라피 ‘운정체’ 창시자

지필묵의 조화로 만든 조형적 운율과 상념이 서정적으로 담긴 ‘우리글 문인화’의 거장, 지하철 1호선과 서울시청 현황판 필체를 쓴 도안사이자 문인화가인 운정 박등용 선생은 전북 임실에서 서예와 문인화를 어릴 때부터 가까이하며 훗날 금파 고병덕 선생을 사사해 자신만의 서체 ‘운정체’를 만들어 냈다. 시서화 기법에 바탕을 두고 산수화와 문인화를 추구하는 성남 운정서화실을 이끄는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다수 수상자이자 심사위원으로서 한국미술협회문인분과이사, 성남서예가총연합회 부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 고려대 교육대학원 서예문화 최고위과정 출강 이력이 있으며 다수의 유명 광고에 서체를 제공해 왔다. 

종횡의 맺음과 결이 모두 아름다워, 현대적 흠상이 가능한 한글과 한문의 캘리그래피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40대 이후 서예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서예란 고답성이 아닌 빛나는 전통의 소산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또한 운정 선생만의 ‘낙관’인 운정체로 마무리된 운정문인화는 서양의 캘리그래피에 동양의 수묵담채 미학을 더한 성향으로, 붓끝의 기백에서 봉황의 곡선과 용오름의 웅장함까지 재현한다. 중봉의 가로 폭과 중심이 두터우며, 각과 호가 또렷하여 강인하면서도 정겨운 운정체는 한글과 한문 모두에 특화되어 예서와 행서, 초서를 오가며 수없이 먹을 갈고 일필에 고뇌를 담은 운정 선생의 수십 년이 깃든 글씨이다. 과거 선비들이 마음을 비우고자 비망록처럼 하루를 기록하고 정서의 흐름을 산수의 준법에 담았듯, 이러한 문인화를 계승한 운정 선생에게 중요한 점은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린다 싶은 요소”로만 그리는 것이다. 그러한 운정체와 운정문인화의 바탕을 이루는 첫 작업 또한, 바로 선(線)이기도 하다.

서예와 세필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운정문인화에 선비의 청렴한 영혼 담다

서예에서 필획과 서법의 기본기는 필수다. 진정한 서예의 도는 점획선조를 재현하는 기술보다는 곧은 정신으로 붓을 들고 일점을 일필로 이어가며 부단히 수행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운정 선생도 운정서화실의 서화인들에게 선을 조절하는 단계는 먹을 갈 때부터이고, 선을 수양하는 데서 서예가 시작되며 사군자의 그림이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선은 모든 작품의 기본이요, 시작이기에 선의 흐름이 명확할수록 난을 치며 산수의 절경이 흐르는 시서화의 풍류와 문인화의 기백이 생긴다. 사람의 혈관이 막히면 거동할 수 없듯, 서예와 서화 역시 선이 흐리면 종이 위에 마음의 형태를 담을 수 없다. 그렇게 철저히 선을 수행한 결과, 운정 선생의 서예는 명확해졌으며 과거 문인화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극사실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초상의 세필법을 수묵 위에서 발전시켜 갔다. 서예에 앞서 하나의 선을 결정하고 필체를 고른다는 운정 선생은, 농묵과 담묵 사이 중묵의 수많은 명도를 고심하면서 필획 연구에서도 새로운 서체의 가능성을 읽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서예가 중봉의 안정감에서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듯, 문인화 영역에서 그의 세필은 선의 결이 너무나 하늘거리고 촘촘해, 때로는 그 정교함이 흡습된 발묵의 번짐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는 과거 문인화의 이상향을 극대화한 진경산수의 은은함에 빠지기보다는 초상화의 세필기법을 현대화한 생물묘사의 정교함에 강세를 보이는데, 이는 세필 한 가닥에도 고아한 선의 따뜻한 혈맥을 따라 문인의 미학과 정신을 담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정성이 깃든 필법이 그의 그림에서 읽을 수 있는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람쥐와 참새, 닭, 그리고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우수상을 안겨 준 독수리, 호랑이 등 맹수들의 털 결들은 대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표현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선과 농담(濃淡)의 명암이 어우러진 독화(讀畵)를 추구하는 그의 현대적 문인화 그림에서는, 풍경과 반추상, 정물에 이르는 모든 대상에 대한 서정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운생동한 운정체에 지필묵을 가까이한 선비의 뜻과 청렴한 영혼을 더해 한글 필법의 조화를 이룬 운정 선생은, 그 명징한 서화론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한국 서예를 견고하게 지탱해 나갈 뜻을 밝혔다. 나아가 필압의 언어인 캘리그래피와 묵의 깊이와 번짐에서 비롯되는 서예의 공존을 모색하고 이상적인 중용의 덕을 보인 운정 선생은, 앞으로도 섬세한 수묵화법을 위한 용묵과 용필의 수련을 이어나가 후대의 귀감이 될 시서화의 예인으로 역사에 남겠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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