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과 의병투쟁 후원 가문의 후예, 월전 선생이 남긴 사재환원의 의미
한학과 의병투쟁 후원 가문의 후예, 월전 선생이 남긴 사재환원의 의미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2.03.1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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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 탄생 110주기 맞이해 ‘화맥(畵脈)’과 ‘유지(遺志)’의 공익성을 생각하다”
월전미술관 장학구 이사장
월전미술관 장학구 이사장

1912년 충주에서 출생하여 2005년 향년 94세로 작고한 화가 월전 장우성 선생은 한국 화단에서 독보적인 신문인화를 구축한 인물이다. 평생의 소원인 월전미술문화재단 설립과 함께, 대표작들과 개인적으로 수집한 고미술품을 모두 재단에 기증한 월전 선생의 유지는 공익목적의 미술관 개관이었다. 그리고 1991년 개관된 사립 월전미술관은 월전 선생의 유언에 따라 월전 선생의 셋째아들인 현 월전미술문화재단 장학구 이사장의 주도로, 2008년 1천억 원 대의 자산을 경기 이천시에 기부함에 따라 이전 형식의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으로 재개관된다. 이천을 대표하는 미술의 명소인 월전미술관은 월전 선생의 유작과 소장품 1천 5백여 점을 소장한 명성 속에서 한국 시서화와 고미술의 문화기부가 얼마나 중요하며, 후손들이 한국화의 위상을 어떻게 높이고 계승해 나갈지 많은 화두를 던진다. 올해 월전 선생의 110주기를 기념하며, 장 이사장은 월전 선생의 삶과 월전미술관의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미술관 개관에 얽힌 사연들과 항간의 이야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해 왔다. 

신문인화와 표준영정의 영적 기반, 한학자 가문으로부터 갈고 닦다

전통 시서화 삼절의 격식을 온전히 갖춘 근대 문인화가이자, 동양철학에 현대조형기법과 색감을 가미한 신문인화의 기반을 닦은 월전 장우성 선생은 한중미술교류 및 미국 현지에 한국화의 영역을 널리 알린 미술교육자, 월전미술상과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 권위자이며 동방예술연구회를 창립한 석학이다. 또한 고미술전문수집가로서 사재를 들여 훗날 미술관 개관을 목적으로 해외 개인전 때마다 세계 각국의 고미술품을 소장했으며, 1973년 당시 표준영정 1호로 지정되기도 한 충무공 영정을 비롯해 1970년대 유관순, 윤봉길, 정몽주,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등 다양한 표준영정을 제작했다. 인물화, 산수화, 영모도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선정된 월전 선생은 2003년 중국현대문인화 거장 리커란(이가염)과의 2인전으로 당시 언론매체의 상당한 관심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같은 월전 선생의 신문인화 성향은 상서회에서 익힌 서예, 위당 정인보 선생 문하의 한학, 이당 김은호 선생의 동양화로부터 형성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사대부가의 의병투쟁 주축이 된 화서 이항로 선생의 양이보국(오랑캐를 물리치다), 위정척사(성리학 외의 사학을 배격하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월전 선생의 조부 만락헌 장석인 선생과 부친 일재 장수영 선생의 행적은 모두 금계 이근원 선생, 실곡 이필희 의병장, 광암 이규현 의병장, 이병덕 의병장의 활동자금을 지원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보호한 의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천 석의 자산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선비 가문의 일원인 부친과 조부는 월전 선생을 일본식 정규교육과정인 보통학교 대신 한학자들의 제자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의 사상은 그의 화풍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월전미술관의 시작, 선조들이 지킨 곳에서 후손에게 문화를 전수하도록

예술원 회원이자 1976년 은관문화훈장, 2001년 금관문화훈장 서훈으로 한국미술계의 가장 높은 입지에 오른 월전 선생은 동양철학사상을 논한 정기 문집 <한벽논총>을 발간하는 한편 삼청동에 한벽원((寒碧園)을 세우며, 뜻 있는 속세의 사람들이 차디차고 고매한 선비정신을 되새기기를 바랐다고 한다. 또한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사업이 아닌 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장 이사장에게 임종 당시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월전미술관의 계승과 모든 자산을 공익목적으로 사용할 것을 당부하였다. 장 이사장은 이에 따라 1920년 장석인 선생이 여주 홍천으로 이주하여 의암 문하의 의병활동가들을 수호하기 시작한 일에 의미를 두고, 부친의 의견대로 2007년 8월 월전미술관을 이천의 시립미술관으로 개관하는데 동의하고 기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정공로훈장과 동백장을 수상한 독립운동가 유달영 선생의 연고지로 의미 있는 이천에 내려온 장 이사장은, 관계된 공무원들과의 상의 끝에 부친의 고향 여주 대신 이천을 택한 것에 대해 “유 선생과 부친은 각별한 사이였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절부터, 시를 쓰고 소일하며 언제쯤 온전히 국권을 되찾고, 통일되어 잘 살 것인지를 언제나 진지하게 논하곤 하셨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월전 선생의 생각을 반영해 그림과 유물을 이관하며, 건물을 제외하면 조경조차 갖춰지지 않았던 미술관 터를 손수 정비하고 개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당 김은호 선생의 친일을 거론하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검증 작업을 시작하여, 장 이사장은 미술관 운영 못지않게 이를 반박하는 자료수집 작업에도 몰두하게 된다. 

필화 아닌 필화사건으로 월전미술관의 참된 의미가 사라지지 않기를

장 이사장은 1936년 후소회 창립멤버인 월전 선생이 총독부 권한으로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 수상 후 감격했다는 기사가 나간이래, “대중 앞에서의 긴장을 감격으로 묘사한 오류를 생전 부친과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에 반론할 증빙자료를 수집하고 전달했으나 만족할 답변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장 이사장은 특히 일제의 압제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정인보 선생과 유달영 선생이 월전의 결백을 신뢰한 인물들로, 한학을 기반으로 성장한 화가들에게는 조선미술전람회가 당대의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는 점으로 월전의 친일행적을 부정하는 증거가 될 서신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월전 선생이 표현한 부동명왕은 고려 밀교와 티벳 불교의 명왕으로, “일본이 이를 받아들여 숭앙한 것은 나중의 일이자, 이러한 사유로 월전 선생의 화풍에서는 부동명왕처럼 권력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일제도 멸망할 것이라는 의미를 파악한 유달영 선생 등의 의견이 반영되기는커녕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사전에 등재됐다”고 한다. 또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이 나중에 바뀐 것은 당시의 참고자료인 고문당한 후가 아닌 이화학당 재학당시의 추가자료 발굴로 인해 수정된 것이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또한 징비록에 묘사된 선비의 풍모와 담력을 갖춘 모습을 살려 그린 점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인 표준영정이 없는 위인들의 통일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미술작업일 뿐, 군부어용행위로 간주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천시의 외면 속에서 월전 선생의 탄생 110주기인 올해까지 이러한 도돌이표 논쟁은 계속된다며, 장 이사장은 부친이 기증한 문화유산과 증조부 대부터 이어진 선비 가문의 뜻이 훼손되지 않고 후손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도록 이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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