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화공들의 영혼에서 얻은 교훈 토대로 이룬 ‘서용 표’ 그림
돈황 화공들의 영혼에서 얻은 교훈 토대로 이룬 ‘서용 표’ 그림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1.03.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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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의 가치는 역사성에 있으며, 이제 나의 창작은 예술을 향한다”
서용 화가/동덕여대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중국북경중앙미술대학 벽화과 객좌교수
서용 화가/동덕여대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중국북경중앙미술대학 벽화과 객좌교수

 

서용 화가는 동양의 전통적인 벽화기법을 기초로 현대적 정서를 작품에 담는 작업을 하는 작가다. 그는 마대를 붙인 캔버스 위에 황토를 바르고 고운 백토를 덧바른 뒤, 석채 안료를 개어 벽화를 재현한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간쑤성 돈황 막고굴에서 돈황벽화와 살다가 한국에 돌아온 그는 중국학자들도 탐낼 돈황 전문가요, 벽화의 재해석자이자 란주 대학과 돈황연구소가 공동 개설한 최초 돈황학 박사 4인 중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하자마자 경기도 양평에 6m높이의 작업실을 꾸몄고, 서울 옥션센터에서 ‘영원한 사막의 꽃, 돈황(敦煌)’이라는 타이틀로 대규모의 귀국전을 연 이후 수차례 초대전을 통해 한국에 돈황벽화의 가치와 예술세계를 담은 작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그리고 2019년, 동덕아트갤러리에서의 ‘서용 벽화전-천상언어’에서 그는 마침내 돈황예술을 벗어나 21세기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이며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 학자정신에 입각한 예술을 추구하며 돈황의 영혼과 불화, 벽화의 기초위에 현대적 정서까지 두루 녹여내는 화가가 되기까지, 그가 이뤄낸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 그리고 빛나는 성취들을 되짚어 본다. 

‘죽의 장막’이 열리고 실크로드 사막의 금빛 꽃으로부터 예술을 보다

1962년생의 서용 화가는 최근 불화작가나 돈황전문화가도, 벽화전문화가도 아닌 ‘서용 표’ 그림으로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전해 왔다.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지도교수였던 일랑 이종상 교수의 영향으로 벽화에 관심을 가진 그에게는, 한중수교직후 ‘죽의 장막’이 열리던 1992년 민간인 중국미술유학 1호로 중국 최고의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에서 판화와 벽화를 전공한 독보적인 이력이 있다. 1996년 중국 미술관에서 열었던 개인전을 끝내고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돈황벽화에 매료되어 돈황학 박사코스에 들어간 그의 출발은 이후 7년간이나 이어졌으며,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살아간 그에게 돈황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작가가 명문장을 필사하듯 돈황벽화들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다져진 기초는 현대적 미감을 가미한 창작으로 발전하여 한동안 그의 작품에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이처럼 독특한 행보 덕분에 2006년 중국언론이 주목하고 중국내 국제관계에 공헌한 외국인 12인을 지정할 때, 서용 화가는 그중 문화계 인물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덕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불교 미술의 현대화 작업과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등 고구려고분벽화와 우즈벡 아프라시압궁전벽화를 복원하는 데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런 그가 지난 2019년, ‘서용 벽화전-천상언어’에서 보여준 연작들은 전통적 벽화기법에 목각을 콜라보하는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판화와 도자, 부조 등 다양한 기법을 공부했던 경험으로 재료사용 측면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법들은 동양화와 서양화, 공예, 조각 등 한국 미술계에서는 엄격하게 구분하는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로 융합시켜 ‘서용’만의 독특한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실크로드 사막에 핀 금빛 꽃으로부터 얻은 메시지로, 이곳을 오가던 무역상들에 의해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섞이고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려 준 이름 없는 돈황 화공들의 영혼들이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벽화는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예술이자 역사의 기록이기에 귀한 그림”

벽화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가능한 회화이다. 서용 화가는 벽화공부를 위해 유학을 준비하면서 서양의 프레스코화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대신 동양벽화인 중국을 선택한 결정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1994년 열었던 중국 중앙미술학원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솔드아웃 시키고 촉망받는 청년작가로 중국 현지 미술계의 찬사를 받던 그가, 1996년에 베이징 중국미술관 두 번째 개인전의 이른 성공을 뒤로 하고 돈황 석굴벽화에 이끌려 새 둥지를 찾은 과정은 국내외 언론매체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그에 따르면, 오래 전 동아시아와 서역이 교역하던 시간의 흐름이 새겨진 돈황석굴에는 회화, 조소, 부조, 공예, 도자까지 모든 미술영역 어우러져 천상의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 중에서도 벽화는 천 오백여 년이 지난 후 우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그림으로 들려주는 ‘벽 위의 역사서’이기에 고결하다. 중국이 동북공정 문화침공을 진행하며 고구려벽화를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이면에는, 수백편의 논문과 글로써 주장하는 것보다는 벽화를 가져가는 것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활자보다 강력하게 전달하는 벽화의 ‘회화적 역사성’에서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운명이자 인연인 돈황을 나온 17년, 돈황 전문벽화보다 ‘나’를 담는 그림

신의 이끌림처럼 돈황의 사막으로 들어가던 시절, 그는 큰 고민거리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를 누르던 것은 1996년 중국 미술관 개인전 이후 겉으로는 화려한 주목을 받았지만 아쉬움을 남기던 허탈감과 해법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그런데 먼 길을 달려 돈황석굴벽화들의 웅장함에서 예술의 실체를 본 뒤, 동굴 해골물에 깨달음을 얻고 여정을 포기한 원효와 명사산 절벽의 금빛에서 천불의 재래를 본 낙준 선사처럼 돈황을 선택한 그는, 벽화모사로 필력과 화업을 닦은 대만의 장대천처럼 7년 간 그림을 그렸다. 모든 명성은 이러한 사연으로 그려 온 그림으로 얻었기에, 지금도 그는 작품을 하면서 여하의 구속적 요소를 제거한 개방적인 생각을 유지한다. 또한 한국의 불교미술이 21세기 대중의 정서와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통감하고, 종교미술의 코드 또한 현대의 정서를 읽어보고 분석하여 새로운 개념을 세워야한다는데 주목한다. 서용 화가는 예술은 대중위에 군림하는 절대가치가 아니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동감해주고 작품을 만드는 기쁨을 대중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성취의 순간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순간이 아니고, 전시장에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눈물로 감동을 표현한 어느 여성 관객을 만났을 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작가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예술로 사람들이 행복하고 감동받는 작품을 창작하는 시간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 돈황벽화를 만났을 때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를 바라보고, 고대에 저 그림을 그렸을 화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가라는 삶의 지표를 삼았듯이, 작가 본연의 자세를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한다. 지난 해, 10년 간 맡았던 한국돈황학회 회장직을 내려놓으면서 그는 ‘돈황’도 같이 내려놓기로 했다. 그는 돈황벽화전문가라는 명성으로 살아가기보다 이제는 주변에 널부러져 잡다한 것들을 비우고 화가의 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서용 화가는 돈황에서 이전의 것을 비우고 화가의 길을 다시 시작했듯이, 또 다시 신진 작가의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빛바래고 해진 1,600년 전의 고대벽화에서 21세기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보고 흥분했던 그는, 죽음의 길 실크로드를 건너는 구법승의 마음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떠나고자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벽화라는 연으로 이어진 그의 메시지에, 언젠가 “21세기 벽화예술은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어느 먼 미래, 어느 갤러리 관객들의 미소와 찬탄이 돌아오는 것도 기대해봄직 하다. 마치, 그가 돈황에 들어간 첫 날 1,600년 전 돈황의 석굴을 다듬던 어느 화공의 성실한 하루를 느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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