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개 높은 선(線)의 필치(筆致)로 물 흐르듯 고운 운정체의 시구를 담은 문인화
기개 높은 선(線)의 필치(筆致)로 물 흐르듯 고운 운정체의 시구를 담은 문인화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01.10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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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붓을 밥과 수저만큼 가까이해 마음을 담으면 그림의 선에도 뼈와 피가 담기는 법”
문인화가 운정 박등용 선생/운정서화실 원장
문인화가 운정 박등용 선생/운정서화실 원장

풍경화가 문인화에 발을 담그면 진경산수화가 된다고 하듯, 문인화는 전문화공이 아닌 선비의 정갈한 마음수양 중에 붓을 들어 그날의 소회를 푸는 일기와 같은 시서화였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독학으로 배운 뒤, 금파 고병덕 선생을 사사하고 기본기를 닦아 40대부터 서예, 산수화, 문인화를 추구하는 성남의 운정 박등용 선생은 전통 문인화에 독창적인 ‘운정체’로 어여쁜 우리글 한 수를 담은 새로운 개념의 문인화를 만들어 냈다. 자연과 생명을 따뜻하게 관찰하며, 단 하나의 선에도 혼을 담아 끝없이 연습하면 필치에 작가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음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운정 선생의 그림 같은 삶을 들여다보자.

전통 문인화가 현대의 캘리그래피를 만나 세상에 유일한 한 폭의 시서화 만들어

지하철 1호선과 서울시청 현황판 필체의 주인공, 문인화가 운정 박등용 선생은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다수 수상자이자 심사위원으로서 한국미술협회문인분과이사, 성남서예가총연합회 부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 고려대 교육대학원 서예문화 최고위과정 출강 등의 이력을 갖고 있다. 운정 선생에게 행정업무만큼 중요한 것은 성남 모란의 운정서화실과 후학들의 작품 활동을 돕는 일이다. 운정 선생은 세밀하고 사실적인 세부묘사에서 반추상을 아우르는 현대 화풍과, 한지 위에 곱게 난을 치는 수묵화와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림을 접목하며 작품을 그린다. 운정 선생은 그런 이유에서 색보다는 선을 고를 때 가장 신중하다. 어떤 선을 고르느냐에 따라 그림의 마음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수묵 담채화에 현대의 캘리그래피가 들어간 듯 색다른 운정 선생의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선은 ‘운정체’이다. 
운정 선생만의 고유 필체이자, 가로 폭과 중심이 유난히 두터워 다정다감한 굴곡을 지닌 이 글씨는 본래 서예에서 하나의 선을 결정하고 예서로, 행서로, 혹은 초서로 쓸 것인지 끝없이 연구하고 반복해 붓을 든 세월이 쌓여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운정 선생의 그림은 꽃과 나무, 그리고 새와 곤충이 어우러지는 정물과 풍경 그 어디엔가 있다. 운치 있는 장면과 그 주변의 단아한 여백으로 나타낸 서정적인 문인화에는 수채화구로 나타낸 프로타주나 드리핑 같은 기법에서, 고전적인 난을 치는 농담(濃淡)과 정갈한 곡선이 함께 들어 있다. 짧은 수필에서 격언까지 다양하게 적힌 운정체 글씨를 훑어 읽으며 날개를 펼친 참새와 노니는 닭을 보노라면 무릉도원이 어느 덧 눈앞에 있다. 

운정의 문인화 비결은 바로 선(線), 그 선에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선비의 청빈함 담아

문인화의 개념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린다 싶은 요소만 있는 그림”이라고 하는 운정 선생은 제자들에게 항상 ‘선’을 강조한다. 선은 그림과 글씨가 공존하는 시서화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한 줄의 선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하고, 난초 하나의 곡선을 표현할 때도 자신의 손에 교만함을 담지 않는 것이다. ‘운정체’ 이후 캘리그래피 요청을 많이 받는 운정 선생은, 수없는 연습을 거쳐 살아 있는 선에서 혈맥과 뼈의 흔적을 찾아야 자기 작품이 완성된다고 한다. 이렇게 붓 속에는 생생한 선을 찾기 위한 많은 깨달음이 있기에, 우선 많이 그려 보아야 하며 이 원칙은 수십 년 경력이 있어도 변치 않는 진리라고 한다.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성향을 결정하기보다는, 일기처럼 불현듯 마음이 가는 요소가 있을 때 뭔가가 나오게 된다는 운정 선생은 대신 남들이 그리지 않은 새로운 선과 구도로 가기에 운정체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그림이 나온다고 덧붙인다. 또한 그릴 때는 가늘고 긴 족자 그림을 운치 있게 완성하거나, 붓이 가는 대로 간결하게, 혹은 생동감 있고 섬세한 명암을 넣어 표현하기도 한다. 
한 작가에게 이렇게 많은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같은 매난국죽이라도 그리는 당시의 감성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성된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소나무 위를 노니는 사진처럼 정밀 묘사된 다람쥐, 간결한 선으로 된 줄기와 그 위에 입체적인 광택이 묘사되어 피어난 꽃잎이 공존하는 그림 또한 운정 선생의 해를 거듭할수록 성숙해지는 개성을 보여 준다. 
한편, 세간에 털 달린 동물 중 못 그리는 것이 없다는 호평이 자자한 운정 선생은 쥐의 해 2020년을 맞이해 서(鼠)선생보다는 좋아하는 다람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귀여워 쓰다듬어 준 다람쥐가 놀라 숨이 끊어진 것이 안타까워 위로하고자 그린 다람쥐들은 앞으로도 운정 선생의 족자 속에서 새로운 기법으로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정 선생은 2020년 새해를 맞아, 새로운 풍으로 접목한 글과 그림을 시도하며 지금까지 그랬듯이 옛 선비들처럼 아끼는 사람들과 시서화의 풍류를 청렴하게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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