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실과 씨실 너머 보이는 그리움에 사무친 이름 한 줄, ‘어머니’
날실과 씨실 너머 보이는 그리움에 사무친 이름 한 줄, ‘어머니’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4.02.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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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적 선 긋기 패턴에 한국적 사물을 넣고 자수표현 변화 도입”
화가 최금란 작가
화가 최금란 작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폭 위에 세필로 모시, 광목을 똑같이 그려내는 화가, <그리움> 주제의 연작을 시도하는 화가 최금란 작가가 이 직조기술에 수예까지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2021년 한류문화원 특별초대전 작가에 선정되며 2022년 대한민국 국가미술특별초대전 선정작가(대상)의 영예를 얻었고, 세계 8개국 특별초청개인전도 다녀온 바 있다. 콜라주가 아닌 세필로 표현한 독창적인 ‘물감 베 짜기’ 작업도 놀랍지만, 그는 더 나아가 세필로 수를 놓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사진처럼 선명히 재현하는 중이다. 그의 그림은 어머니의 손길을 물려받아 동기화된, 그의 노력이 보여준 아름다운 성취이기도 하다.

베를 짜듯, 수를 놓듯 그려 낸 나의 그림은 어머니의 헌신 닮아
2024년 1월 19일부터 2월 14일까지 종로 서경갤러리에서 열리는 <최금란展>은 날실과 씨실의 작가, 물감과 붓으로 천을 짜는 화가 최금란 작가의 작품 26점을 소개하여 눈길을 끈다. 그간 <그리움>, <소통>, <마지막 잎새>, <만남>처럼, 감수성이 완연한 주제로 뽀얀 모시천을 한 줄 한 줄 그려 온 최 작가의 작품은 정성을 넘어 신념에 가깝다. 토분 혼합재료로 밑바탕을 깔고, 배경과 주제를 나타낸 뒤 극세필로 선을 그어 천의 형상으로 만들기에, 100호보다 작아도 밤샘이 일상이며 그림 당 4개월 이상은 잡아야 한다. “인내를 넘은 수행”이라고 말하는 최 작가의 기술은 이미 천을 완벽히 짜는 선 긋기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찢어 겹쳐진, 올이 풀려 뭉친 모시를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기술은 <얼-모시>에서 정점에 달했는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생성>은 직조식 종횡단 선을 방사형으로 구사하며, 아라크네의 재림처럼 푸른 배경 속 거미줄을 짠 형상에 눈송이와 꽃무늬를 수놓듯 그렸고, 반대로 동양화의 붉고 토속적인 바탕 속에 거미줄을 나타낸 연작도 있어 좋은 대조를 보인다. <만남>에서는 밑작업, 모시, 동아줄까지 세 단계로 겹친 파격을 보인다. 공통점이라곤 오직 실 역할의 흰 선을 긋는 것 뿐, 그는 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변용해 가장 고전적 영역인 베 짜기와 그림을 초월적 판타지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이렇게 기술과 예술의 조화로 파리 루브르 아트쇼핑은 물론, 독일, 중국, 일본, 베트남, 싱가폴 등 전 세계 갤러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의 작품에 그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설득의 힘을 더한 것은, 아마도 그가 말하는 작품 모티브가 바로 ‘어머니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투박한 대로, 촘촘한 대로, 성긴 대로, 어머니의 모든 삶은 손이 해지도록 희생과 헌신으로 새겨낸 삶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미리 끊어둔 옷감으로 자식의 원피스를 손수 만들어주시던 어머니와 동기화된 기억을 더듬으며, 최 작가는 모든 선의 흔적을 어머니를 향한 아름답고 그리운 기억과 추억으로 새겨나갔다고 한다. 

고난과 시련 속에 창조하는 작가정신으로, 우리 정서와 편안함 담다
그 밖에도 최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요소는 투병과 고통이었다. 35세부터 희귀암으로 6개월에 한 번씩 3년 간 총 50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거치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예수의 가시면류관과 성혈을 닦아낸 <십자가의 보혈로>로 영적 극복을 꾀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화가의 소명과 함께 어머니로서의 책임과 고령의 시어머니 간병 일도 어깨를 짓누르는 중이다. 그런 삶 속에서 씨실과 날실이라는 모티브는 다양한 패턴 소재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어졌고, 어머니의 삶을 그리워하고 경배하는 최 작가의 마음은 우리의 고유 정서와 얼이 깃든 소재를 향한 애정으로 새로운 색실을 꿰었다. 그래서 이번 개인전에 소개한 <그리움> 작품들은 더 깊어진 그의 내공을 짐작케 한다. 바탕을 깔고 모시를 표현하는 기법은 건재하지만, 찻사발과 어여쁜 막사발이 살포시 놓여 있거나 혹은 실루엣으로 숨겨져 있고, 그린 뒤 천으로 덮은 형상으로도 등장한다. 이렇게 드러낸 <그리움> 속 물건들은 토기, 청자도 있지만 다식과 기와, 왕실에서 볼 법한 저고리와 치마장식, 아리따운 단청무늬까지 다채롭다. 이처럼 과정은 지난하나, 결과는 편안하고 서정적인 그의 손기술은 이제 몽환적 꿈의 영역에도 맞닿아 있다. 창의적 기법이 구상적 소재, 비구상의 주제를 넘어 발현된 <길 위에서>는, 글씨와 문양이 노리개와 문발, 장지문 패턴을 수천 가지로 전개한 후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흘러가는 새로운 유형의 영적 몽유도 자수화다. 최 작가에 따르면, “세필에 거듭 물감을 찍어 그으며 선을 만들고, 대여섯 번 더 그어 뭉치는 부분을 표현한 어려운 작업을 시작한 건 독창성이라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자 점과 벌집 문양같은 새로운 직조법을 만들고, 접대와 교류의 상징인 찻잔과 우리의 시대상을 담고자 ‘분청다완’이라는 소재도 골랐다고 한다. 최 작가의 작품은 이처럼 탁월한 모티브와 소재의 조화 덕분에, 복잡한 이즘(ism) 없이도 가슴으로 설득하는 편안함만 남는다. 그의 장기는 또 있다. 새로움을 제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기존의 추억과 감흥을 더 빨리 끌어올려서 어필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어머니’와 ‘전통’ 외에도 설득의 기술을 생득(生得)하고 있는 최 작가의 작품이 동서양 모든 갤러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이유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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