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사이 오름, 파도 같은 구름, 섬과 같은 대자연의 축복, 한라산
구름 사이 오름, 파도 같은 구름, 섬과 같은 대자연의 축복, 한라산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12.20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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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광활한 마음의 풍경을 연, 붉은 한라산 천아오름에서 시작됐다”
채기선 화가
채기선 화가

제주가 낳은 한라산 전문화가, 채기선 화가가 11월 10일부터 28일까지 강남갤러리 아트뮤제에서 개최하는 한라산 초대전은 한반도 최남단 최고지대 한라산과 백록담의 세 가지 색 블루, 레드, 화이트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생생한 색감과 묵직한 질감에 300호 이상의 대작으로 한라산의 스케일을 담은 이번 전시는. 자연 속 신비로운 한라산의 웅장한 스케일로 시시각각 달라져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한라산의 이미지를 다각도로 담고 있다. 인물화와 풍경화를 충분히 경험한 뒤 작가로서 최후의 보루가 될 한라산의 독자성을 발견해낸 채 화가로부터, 이번 전시에 소개한 한라산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았다. 

설문대 할망이 잘라 만든 흰 사슴연못과 구름오름 바다의 섬, 한라산

제주 자연풍경이 아름다운 삼달리에서 태어난 채기선 화가는 인물, 동물, 악기 같은 사물의 클래식하고 우아한 정밀 실사에 강하지만, 그를 지칭하는 단어는 ‘한라산 전문화가’다. `80년대부터 야외풍경을 시작하고 `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제주를 답사한 그는 한라산의 실사 뿐 아니라 계절과 시간에 따른 색채, 위치를 다각도로 관찰해 국내 화가 중 가장 많은 한라산의 풍경과 근접한 구름오름의 모습들을 그려 왔다. 당시까지 1천여 점 이상의 다작을 했지만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대대적으로 정리하곤 했던 그에게, 가장 강력한 삶의 나침반이 된 소재가 바로 한라산이다. 

하늘을 끌어당기는 화산섬 산다운 위용과 우아한 오름을 갖춘, 설문대 할망의 손길로 하늘의 사슴들이 모인 백록담까지 있는 국내 3대 신산(神山)이기도 하지만, 그가 한라산에 유독 감동을 느낀 이유는 `96년 2월 천아오름 인근을 하산하다 붉은 한라산의 강렬하고도 영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후 자신만의 한라산을 그리기로 한 채 화가는, 낮의 평범함까지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경관과 주변 장면을 붉고 강렬하게 표현한 한라산 대작을 많이 그렸다. 그의 시그니처도 천아오름 붉은 한라산과 백록담을 각각 그린 300호 대작 2점이다. 대표 개인전도 <한라에서 백두까지>이며, 2002년 제 2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양화부문 대상을 수상한 한라산 그림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채 화가가 경기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며 쓴 논문도 ‘한라산 형상의 심상표현연구’이니, 이 정도면 한라산과 동기화된 인생이라 할 만하다. 

날카롭고 묵직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입체감과 조면암 산의 생생함까지 

해발 1,947m의 해상 활화산이자, 둥근 순상화산 특유의 아름다운 위용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라산 주변은 일출과 일몰, 계절에 따라 블루와 레드로 바뀐다. 제주에서 평생 물질을 하신 어머니 덕분에 제주의 산과 바닷바람, 삶에 익숙한 그는, 사람들의 풍부한 표정을 고전음악요소와 구상 인물화로 표현했었다. 그는 이런 연유로 한라산도 멈춰 있는 풍경이 아닌 영혼을 지닌 존재인 듯 그린다. 한라산 스케치와 사진을 얻고자 수도 없이 산을 오르내린 채 화가는 “수없이 그리며 수백 번을 오가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다”고 하며, “이 웅장하고 신비로운 한라산의 자태가 흰 구름에 둘러싸이면, 마치 시시각각 변하고 흘러가는 우주의 섭리 안에서 참으로 짧은 인간의 삶을 실감하게 된다. 영적인 감동은 그 긴긴 세월 속에도 홀로 굳건한 산으로부터 온다”고 덧붙인다. 

그동안 실사에 가까운 한라산도 많이 그렸지만, 한 걸음 들어가면 그는 사실상 한라산이라는 인격과 존재감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소장처가 결정된 대작을 완성하면, 떠나보내기 전 더 많은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단 한 장의 그림을 위한 전시를 열기도 한다. 대작 규모로 시도하는 것도 크기를 통해 한라산의 웅장한 존재감과 강렬한 스케일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지만 촬영해 온 백록담 주변의 날카로운 조면암 구조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물기 없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덧칠해 마치 평면 위 디오라마 모형을 보는 듯 구름과 파도, 암벽과 어우러진 생생한 질감까지 구현한 그의 기법은 탄성을 자아낸다. 이렇게 물감을 쌓아 칠하는 것으로 한라산의 광대한 존재감은 물론, 작가의 감정전달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볼 때마다 새로운 한라산이기에, 동시대인들에게 밝은 존재감 전하고파

전업작가로서 전시작업 효율을 위해 채 화가는 서울 강남과 경기 양평, 제주 삼달로63에 위치한 작업실 겸 삼달갤러리 세 군데를 오간다. 세상에는 달을 안은 예수상이나 반지월식의 단 한 컷을 위해 수년 혹은 수십 년을 대기하는 작가가 있듯, 채 화가도 한라산의 단 한 순간조차 놓치기 싫어 30년에 걸쳐 틈나는 대로 오르다 아예 제주에 터를 만든 것이다. 북쪽과 남쪽의 풍경이 다르기에 솟아오른 오름형상도 빛에 따라 달리 비추어지는 한라산은, 지금까지 그에게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백록담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헬리콥터를 타기도 한 그의 한라산 그림은 구름을 마치 파도처럼 표현해, 때로는 섬처럼 보이는 산을 더욱 경이롭게 만든다. 

이리하여 산의 존재감을 보는 그의 해석에 따라 한라산은 눈높이에서 본 신비로운 역광과 심상에 떠오른, 일출과 일몰을 품은 마음의 풍경이 된다. 그리고 때론 붉거나 푸르며 은은하고 간결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그는 “우주의 시간에 비해 인간의 삶은 너무 찰나지만, 삶의 우여곡절을 겪는 동시대인들이 한라산의 위용을 보며 각자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느끼길 바란다”고 한다. 25년 째 한라산 화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삼달갤러리에 한라산 그림을 채워가지만, 그럼에도 아직 목마르다는 그는 더 많은 한라산의 모습을 담아 제주도에 한라산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누구나 그 웅장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감성을 얻도록, 그는 개인전과 아트페어로 자신만의 한라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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