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간의 교직생활 은퇴, 마치 졸업 후 진학하는 학생처럼 새롭게
38년간의 교직생활 은퇴, 마치 졸업 후 진학하는 학생처럼 새롭게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12.20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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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은 새로운 여명, 흘러가는 기록 같은 시간은 추억이자 따뜻한 선물”
전옥희 화가
전옥희 화가

예술은 기술과 감성이지만, 관성과 습관이기도 하다. 작가의 펜처럼 화가도 붓을 늘 몸에 지녀야 한다는 성실함으로 주부, 교사, 화가라는 3인 몫을 너끈히 해 낸 작가, 전옥희 화가는 요즘 교직 은퇴 후 그림에 필요한 감성을 충전하고 있다. 매일 출근하던 일상이었기에 집 근처 작업실에 앉는 것이 어렵지 않고 젊은 시절 늘 그리던 서울행도 자유로워진 요즘, 전 화가의 작품은 무채색에서 조심스레 원색으로 향하던 시절보다 여유롭고 일상의 기쁨, 관계성이 풍부해졌다. 모든 인간이 누리는 시간의 흐름을 선물처럼 생각하며, 그림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 화가의 여행 같은 통산 20회 개인초대전을 소개한다.

인생의 주어만큼 목적어가 중요해지는 시점, 초대전 <시간과 선물> 
11월 8일부터 24일까지 장은선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옥희 초대전 <시간과 선물>은, 과거 무채색 톤의 <세월(Time and Tide)>’ 연작에서 점차 다양한 색과 크기의 기하학적 도형들이 추억을 쌓는 <시간과 선물(Time and the Presents)> 연작으로 향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 27점을 소개하는 자리다. 연작마다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전옥희 화가의 이야기는 규모에 맞는 캔버스를 직접 짜고, 엘리자베스와 엘스펠 키스 자매의 그림여행서사처럼 사람과 거리, 풍경 등 삶의 현장에서 소재를 얻고 기억한 일상을 쌓아 일기처럼 남긴 것들이다. 계명대 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38년 6개월 재직한 고교교사직을 정년퇴임한 그는 맞벌이의 바쁜 삶에 여유를 주고자, 오히려 시간을 적분하듯 쪼개 추상화가가 되었다. 또 대구미술협회초대작가, 신조회운영위원장, 한국미술협회 이사로 더 많은 일정을 보낸 뒤 60대를 맞이했다. 가르치고 돌보는 삶이기에 언제나 누군가의 부사와 서술어로 존재했던 그는 대작 위주의 추상화를 그리며, 평면에서 도색기법으로 입체와 착시를 표현하거나, 상징성 갖춘 도형이 화면을 분할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그만의 구성으로 인생의 목적어를 찾았다. 그가 구상 대신 추상을 택한 것도, 모든 소재의 근원인 작가 자신과 주변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막이 필요해서다. 이 추상이 오히려 더 솔직한 어조로 도형구조를 택해 자유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자유와 해방감을 준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고되지만 정신은 풍요로워진다는 그는, 청년기부터 열심히 일한 보상인 여유를 즐기게 된 요즘 틈나는 대로 전국 갤러리 순회를 다니고 젊은 예술가들의 감각을 즐기며 힐링한다. 

추상, 자신의 사연들을 숨겨가며 더 잘 표현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아
말년의 황진이가 시구로 읊었듯, 사람은 혼자 적적할 때 넉넉히 쌓인 추억과 기억을 꺼내 어루만지며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한때 서울행을 접고, 신문특집에서 본 후 쭉 그리던 뉴욕 행을 미루고도 전 화가는 버킷리스트를 펼친 요즘 한국에서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많은 덕분에 물 흐르듯 산다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처럼 잔잔한 삶은, 때로 부침과 변화를 겪으며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상징성을 갖춘 도형들은 세월의 흐름, 과거의 기억마저 자산과 보물처럼 기억된다. 코로나 시즌 첫 해에 그린 <시간과 선물-침묵과 기다림>처럼 도형들이 기하학적이고 엑조틱한 각자의 영역대로 떨어져 분리된 군상들의 안타까움을 그려 냈듯, 그에게는 얼룩과 반점, 붓이 스쳐지나간 흔적도 모두 구성요소다. 좋은 대로, 불편한 대로, 맑은 대로, 비가 오는 대로 자유분방한 붓터치는 서로 다른 속도감으로 도형을 채우고, 공간의 확장, 분할, 3차원적인 입체구성을 명암으로 표현하며 우리의 삶 속 관계성을 이어나간다. 아크릴 믹스미디어로 마치 크레파스로 덧칠한 듯 투박한 효과를 낸 <시간과 선물-울 동네>의 희미한 형상들은 마음속에서 페이드인되어 늘 그 자리에 있던 일상의 장소에 새겨진 시간 단위의 추억까지도 나타낸다. 또한 무채색에서 원색을 향할 때 그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푸른색의 추상은 자연소재 중 가장 좋아하는 시골 웅덩이와 둥근 샘을 표현할 때 가장 두각을 보인다. 성경의 마르지 않는 샘을 은유한 둥근 샘은 마치 싱크홀처럼 깊고 아득하지만, 확장된 캔버스 중앙에서 회전하듯 놓여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들과 갖은 사연들을 함축해 생생한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유흥을 즐기지 않아도 젊게 사는 법, 마치 30세가 된 듯 30년 살기
예술가들에게는 자유로운 쾌락 추구자라는 이미지가 있다. 반면 전 화가는 이와 안티테제 격인 교직 종사자로 주 6일이 5일로 바뀌는 세월을 보내와서, 정년퇴임 후 서울과 대구를 오갈 인생이 기대된다고 말한다. 또한 왕립아카데미에서 직책을 받은 후에야 자유로워진 화가 라비유기야르와 달리, 오히려 인간관계의 부침을 겪을 수도 있는 미협 활동을 자처하며 성장한 ‘시간 적분 전문가’ 전 화가는 “한국미협을 비롯해 미술인들과의 의리를 좋아하지만,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음주가무 없이 건강한 삶을 이어나가려 한다”고 한다. “이번 초대전도 페이스북으로 교류하던 관장님과의 인연 덕분이다. 창작과 충전이 중요해 문화센터 강좌요청은 일단 사양했다. 작품에 뭘 보여주려는 것보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는 그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나는 훗날 미술에 전념하고자 젊음을 적립해 은퇴를 맞이한 세대다. 늙으면 뭔가 늘어지고 처지면서 가르치려 드는 습관이 생긴다는데, 혼자 지하철도 타고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즐기며 남은 시간을 2-30대처럼 살까 한다”는 그는, 24시간이 예술의 새로움을 알아가는 행복으로 채워진다고 덧붙인다. 그런 그의 신변잡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흔적들이 추상으로 2차 가공이 잘 되는 까닭도 있지만, 삶을 인도하고 위로하는 그림의 순기능을 제 3자 입장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연이 모든 생명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준 귀한 선물이기에, 이 간결한 일상기록물을 대작으로 승화하며 풍부한 메시지를 전하는 전 화가의 창작의 샘이 그의 호수와 샘의 이미지처럼 앞으로도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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