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고 순환하듯, 디지털 영역을 빌린 인간의 왜곡된 표정들
요동치고 순환하듯, 디지털 영역을 빌린 인간의 왜곡된 표정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11.24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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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파도에 시달린 고달픈 얼굴로 통념 벗어난 진실 보여주다”
한재철 화가
한재철 화가

모든 바닷물은 윤슬로 빛나다가도 해무처럼 시야를 가리고, 해류로 흐르다 파도로 부서진다. 이렇게 연결되어 변해가고 순환하는 바다처럼, 마음속 인지와 관념의 연결고리를 들여다보며 상상을 덧대고 꺾어 표현하는 한재철 화가가 11월 1일부터 21일까지 윤아트갤러리에서 초대전 <휴먼페이스>를 진행 중이다. 그는 물감과 디지털 픽셀의 도움을 받아, 주변에서 벌어지지만 눈에 띄어야만 알 수 있는 오묘한 현상을 기록한 ‘비틀고 멈추기’ 라는 메인 주제를 변용해 오고 있다. 최근의 항해와 휴먼 연작 중, 후자의 소주제이자 1991년부터 시작했던 ‘페이스시리즈’라는 오일페인팅 31점을 모은 이번 전시와 그의 근황을 소개한다.

작품이 3만 점이어도 절묘한 ‘꺾기’로 터닝 포인트 만들어야 보배

지난 7월 아산갤러리에서 <항해시리즈>를 선보인 한재철 화가가 11월 인천 윤아트갤러리에서 초대전 <휴먼페이스>를 선보인다. <휴먼시리즈>의 소주제인 <페이스시리즈> 오일페인팅 중, 2010년대부터의 변화가 드러난 작품 31점은 마치 맥동변광성이나 중성자별, 무중력 상태의 압박을 받은 듯 왜곡되고 변형된 얼굴들이다. 샴쌍둥이나 배니싱트윈처럼 보편성과 거리가 멀고 때로는 저항감이 드는, 평범함에서 멀어진 이 얼굴들은 다채로운 표정과 내면의 감정으로 시선을 끈다. 한 화가는 주제와 목적이 고착되고 복제되는 작업행위보다는, 테마 확장과 자유연상표현처럼 대중성을 벗어난 유화와 디지털 작업을 병행한다. 지금까지 ‘Twist&Stop(비틀고 멈추기)’라는 메인 주제 아래 3만 점을 만든 다작 비결은 디지털 드로잉인데, 이를 다시 유화로 재해석하는 <타겟시리즈>, <무제시리즈>를 거쳐 온 그는 <항해시리즈>와 <휴먼시리즈>도 재차 레벨 업 시켜 왔다. 이들 시리즈는 인간의 감정에서 시작해 점점 확장해 가는 내면 표현을 그린 것이다. 치장이나 과시보다 흐름과 움직임을 중시하며, 절제하듯 퍼져나가 모호한 경계와 동화되는 그의 시각적 효과는 현상을 고착시켜 전수하는 밈(meme)과 관성, 유전과 같은 복제적 성향을 본능적으로 멀리한다. 대신 내면의 거울로 반영한 심리 스펙트럼을 마치 물감 번지듯 다채로운 리얼리즘으로 표현한다. 이 경우의 수가 바로 그의 3만 점이나 달하는 작품 개수의 비결이며, 표현방식에서 붓의 수작업이든 디지털 클릭이나 드로잉이든 간에 평화로운 수면에 파도가 몰아치듯 한 번씩 ‘꺾기’라는 인상적인 파급을 가해 날카로워지는 터닝 포인트를 넣는다. “거친 흔적은 흉터가 아니라 보배다. 인생을 항해하며 큰 파도와 싸우던 시기에 그린 작품은 곧 작업 시기별 변화가 응축된 흔적이 남는다. 그런 작품에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고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그는, 작품의 심상에 의미가 남지 않으면 미련 없이 파기한 적도 많다고 한다.

항해와 휴먼에 몰두한 올해, ‘노인과 바다’ 같은 초월적 결실 향해

스스로의 내면 정화과정과 말하고자 하는 표현수단에 솔직한 한 화가는, 자기표현을 통해 선입견과 통념을 넘어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 계기를 만드는 것을 세간의 평보다 좋아한다. “50대 후반 들어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큰 바다를 표류하는 항해를 나타낸 <항해시리즈>에 몰두했는데, 그 항해의 닻을 내리고 키를 잡으며 쉼 없이 나가나는 인간의 고달픈 내면을 동정해 <휴먼시리즈>에 들어섰다. 그러다 10여 년 전, 스스로의 나약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자각하며 이를 솔직한 변형과 왜곡으로 표현하게 됐다” 학창시절 용돈을 모아 외국 미술원서에 심취했고, 아이디어를 그만의 거침없는 색감으로 표현해 낸 한 화가는 실사표현보다 내면의 생각과 철학에 연관되는 소재와 사물을 택했다. 그래서 추상에 가까우나, 때로 ‘토끼’와 같은 순수한 실존의 움직임을 은유하기도 했다. 인간이란 아는 범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핸디캡을 가진 존재다. 이 판단이 오류라는 것조차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오히려 한 화가에게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자극하기 위해 한 화가는 왜곡된 재구성을 택했다. 풍파 가득한 항해로부터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한 것이, 숱한 ‘꺾기’를 통해 올바른 나침반을 찾아 인간의 여로를 탐색하는 그의 작업 행위에 도움이 되었다. 그의 태도는 종종 쿠바의 한 어부가 조업 54일 만에 만선을 이뤘다 상어 떼에 전부 잃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좌절에 초연했던 어부의 목소리가 훗날 헤밍웨이에 의해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으로 재해석되었듯, 예술의 붓은 오늘 꺾일 대로 꺾인 하루도 내일 찬란한 광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에 귀한 것이다. 한 작가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뚜렷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휘몰아치는 파도 아래 각양각색으로 이지러진 인간들 개개인의 숭고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그는 “보기에 예뻐서 아파트 벽면에 걸리는 장식용 작품을 위해 불필요한 화장을 덧입힐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한국 미술계에도 이 화장을 걷어낸 작가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현실적 여건이 갖춰진다면 이 많은 작품들로 더 큰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디지털 작업을 평면, 입체, 설치로 재구성해보고 싶다. 세계는 넓고 예술은 영원하니, 넓은 세상에는 이런 작업태도와 작품에 매료될 사람도 많지 않겠는가”는 그의 말에는, 왜곡된 군상의 표정마다 숨겨진 초연함, 솔직함의 가치가 잔잔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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