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 대중화의 주역, 확신과 모험 사이에서 성공의 열쇠를 찾다
페트병 대중화의 주역, 확신과 모험 사이에서 성공의 열쇠를 찾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8.09.12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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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병’의 탄생, 국민 삶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다
한일프라콘㈜ 한규범 회장
한일프라콘㈜ 한규범 회장

[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인류의 역사에서 의·식·주 모두 중요하지만 물을 가볍게 들고 다니며 마실 수 있는 방법은 PET병이 나오기 전까진 없었다. 이것을 해결한 것이 바로 PET병의 탄생이다. 국내에 PET병 사업을 도입한 한일프라콘(주) 한규범 회장은 문익점의 붓통 속 목화씨와 새마을 운동의 보릿고개 해결 등과 더불어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자부한다.  
문익점의 붓통 속 목화씨가 우리 선조들의 의복문화에 기여했다면, 새마을운동으로 보릿고개를 해결했으며, PET병이 탄생함으로써 국민건강증진(우리 몸의 수분율 70%유지)에 단초가 된 PET생수용기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본다.

한일프라콘(주)천안본사
한일프라콘(주)천안본사

[Part 1]

Q. 한일프라콘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한일프라콘(주)의 명칭이 생소하실 텐데요. 플라스틱 콘테이너의 줄임말로 회사 이름을 정했습니다. PET병을 주로 생산 공급하는 회사이며, 본사공장이 천안에 있으며 안성, 동탄에 2, 3공장, 그리고 덕평에 인프랜트 공장이 있습니다.

Q. PET병을 국내에 들어온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인류 역사를 바꿀 사상초유의 큰 발명품인 PET병이 탄생한 것을 신속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모험 정신으로 도입하게 됐습니다.

Q. 당시 PET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아 사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꼭 시작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습니까?

이 세상에 없던 미지의 사업에 뛰어들기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거래처에서 인천에 식용유 공장을 거의 완성단계에 와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존 용기 설비로는 경쟁력이 없고, 이 새로운 발명품으로 생산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어렵게 설득해 기계 설비를 바꿔가며 큰 모험을 하기로 결정해 후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Q. 친인척의 병마개 사업을 인수,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의 한일프라콘(주)로 성장시켰습니다. 사업에 철칙이 있었나요?

사변 후 어려웠던 시절이라 사업의 과실을 월급 타먹듯 소진하면 안 되겠구나싶어 눈사람 굴려 만들듯 종자돈을 마련, 소비보다는 우선 자금마련에 힘써 차차 조그만 결실을 봤다고 생각합니다.

Q. 사업 초기 페트병 생산으로 인해 타 소재의 침체를 이유로 여러 불합리한 제약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어떤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나요?

그때까지의 세상에는 유리병과 캔 등이 대세였으나 PET병이 나옴으로서 기존 용기업체들의 어려움이 심했을 걸로 생각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용을 못하게 막는 위협도 있었고, 수거 재활용의 어려운 문제도 다수 등장했으나 국민건강과 편리함, 깨끗함 등 과거에 볼 수 없던 우수한 발명품에 우리의 생활이 크게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현재까지 몇 종의 페트병을 생산, 유통했습니까?

크게 나누어서 생수병, 기름병, 화장품병, 우유병, 각종 식품병 등을 생산해서 유통했습니다.

Q. 회장님께서 생각하는 페트병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깨끗하고 투명하며 미려한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가벼워 휴대가 용이하고, 저렴한 가격과 원료의 정략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재활용이 된다는 것은 자원으로서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Q. 페트병의 발전은 물 사업발전과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결국 회장님님께서 페트병 사업의 선구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익점의 붓통 속 목화씨가 따뜻한 솜이불과 의식주의 의를 해결했고, 새마을 운동으로 배고픔을 해결한 보릿고개를 옛이야기로 만들고 정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각자는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우물까지는 많이 만들었지만 밥 먹을 때만 먹게 되는 물을 평상시는 굶어야 하는 것 까지는 해결을 못하고 끝났습니다. 이 점을 해결한 것이 PET병이었습니다. 물을 실컷 마시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PET병 사업을 하는 한일프라콘(주) 자랑으로 알겠습니다. 성원해 주십시오.

Q. 최근 많은 청년들이 1인 기업, 창조기업 등 창업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식민지 교육도 조금 받았고, 이어 혼란스러운 시대에 부모를 다 잃고 홀로서기를 외가의 약간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 왔으며 절박한 상황에서 굳은 신념으로 매사에 충실하다 보면 이거다 싶은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렇고 PET병을 하게 된 기회도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로 하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충실하세요. 기회가 있을 겁니다.

Q. 국민들이 페트병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용하고, 인식해주길 바라시나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발명품입니다. 깨끗하게 사용하고, 깨끗하게 버려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부탁합니다.

Q. 앞으로 회장님의 계획이 듣고 싶습니다.

이런 보석 같은 사업이 여러분의 성원과 보살핌으로 대물려 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일프라콘(주)안성공장
한일프라콘(주)안성공장

[Part 2]

전 세계에서 연간 600만 톤이 생산되어 사용될 만큼 우리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된 ‘페트병(PET)’. 그 탁월한 내구력과 내열성, 재생성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조형할 수 있다는 가공성은 각종 음료나 물, 식용유, 간장, 샴푸, 로션 등에 페트병을 널리 사용하게 된 요인이다. 국내PET 산업 정착에 파이오니어로 평가받는 한일프라콘(주)의 한규범 회장은 “페트병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미려함을 갖추고 또한 무게가 가벼워 휴대가 용이하고 가격이 저렴할뿐더러 생산에 필요한 원료로 절약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은 페트병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기였던 1970~80년대 당시, 한규범 회장이 페트병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장점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61년 친척이 운영하던 병마개 생산 사업을 인수하며 플라스틱 사업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사변 후 어려웠던 시기를 거치며 조금씩 모아왔던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기에 더욱 조심스러웠고,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며 기업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데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며 유명 제약회사의 병마개 납품을 시작한 한일프라콘㈜은 이내 국내 유수의 화장품 회사 3~4곳이 사용하는 화장품 용기를 생산하는 전문 업체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1979년, 국내 식용유 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대를 노리던 C사가 인천 연안부두에 식용유 공장을 신축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한규범 회장의 뇌리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한 회장은 “당시의 식용유 용기는 모두 PE병(폴리에틸렌)으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PE병은 가격이 싸고 단단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용기의 탄성이 부족해 온도와 환경, 충격의 세기에 따라 깨질 우려가 있고, 불투명한 색깔 탓에 내용물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반면 PET병은 특유의 투명성으로 내용물이 깨끗하게 들여다보이며, 내충격성과 신장강도가 커 일상생활에서 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고 사용온도가 90℃에 이르며, 알코올과 기름의 투과성이 낮아 식용유 사용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오게 될 이 아이디어는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건설 중이던 C사 식용유 공장에 이미 PE병 생산라인 구축이 마무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 회장은 C사 관계자를 찾아가 페트병의 차별화를 통해 경쟁 업체의 선발 제품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의 열정과 논리에 감화된 C사 수뇌부가 막대한 추가비용을 감수하고 기존 PE병 생산라인과 새로운 PET병 생산라인을 병행 운용하는 모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 한국 페트병 산업史의 시작이었다. 

“저에게도, 국민 모두에게도 ‘보석 같은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독일의 듀퐁사가 탄산음료용으로 처음 개발한 페트병은 국내에 들어와 한규범 회장에 의해 세계 초유의 PET 식용유 용기로 탄생했다. 처음 페트병과 병행 운용되던 PE병 라인은 이내 철거되었으며, 전국의 모든 주방과 식당의 한편에는 투명한 PET 식용유가 자리하게 됐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은 전국적인 페트병 붐은 세정제, 세제 등의 각종 생활용기는 물론, 음료와 생수용기로도 활용되며 국민건강 증진에도 기여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 회장은 “문익점의 목화씨가 우리 민족의 입는 문제를 해결했다면, 새마을 운동은 배고픔에 허덕이던 보릿고개를 극복하게 해주었고, 전국적인 건설 붐과 반대를 무릅쓴 고속도로 개통은 산업의 발전을 일궈내는 기틀을 쌓았으며, 이에 더해 새로운 PET병 탄생은 인간생활을 또 한 번 업그레이드시킨 사건이었습니다”라며, “사람이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게 되는 ‘물’을 언제나 손쉽고 깨끗하게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페트병’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N포 세대’라 불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 속에 모든 걸 자포자기해 버리고 마는 청년 세대들에게 한규범 회장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훈을 준다. 한 회장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조국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겪으며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외가에서 약간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맨 몸뚱이 하나로 버텨야 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굳은 신념으로 매사에 충실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나 아이디어를 살려 조금씩 성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PET사업을 일으키게 된 것도 그런 기회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며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매사에 충실하다는 것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며,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기회를 성공으로 바꾸어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라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이에 덧붙여 한 회장은 “페트병은 깨끗이 사용한다면 손쉽게 재활용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재활용 플라스틱입니다. 재활용 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페트병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들의 관심과 노력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페트병 도입 초기,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이유들을 들며 사업 확장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국내·외를 넘나들며 모은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페트병 사용의 합리성을 입증한 바 있는 한 회장이었기에, 이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실제로 그는 1992년 32개 업체와 페트용기협회를 결성해 10여 년간 회장을 역임했으며, 연간 8천 톤의 폐 페트병을 재활용 할 수 있는 설비도 구축했다. 또한, 손쉽게 페트병을 압축할 수 있도록 돕는 기계를 개발해 지자체에 기부하는 등 재활용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듯, 한규범 회장이 지금껏 걸어온 길은 언제나 국민들의 삶, 국가의 이익과 맞닿아 있었다. 크고 작은 실패, 갖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무릎을 굽히지 않았던 까닭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한일프라콘㈜의 성장에 보내 온 국민 모두의 성원과 보살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오랫동안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길 바란다는 한규범 회장. 그의 이 작은 소망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희망과 용기의 싹을 틔워낼 씨앗이 되어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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