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자연의 빛을 조각하다
일상과 자연의 빛을 조각하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6.1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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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현옥전_모란미술관 2전시실_다문화 가족 시리즈
5.백현옥전_모란미술관 2전시실_다문화 가족 시리즈

모란미술관이 올해 첫 번째 전시로 <백현옥>展을 개최한다. 60년이 넘는 조각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조각가 백현옥은 다양한 조형언어를 모색해왔고, 자연스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1960년대 한 때 추상조각을 실험적으로 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 초반 이후 그는 구상작업에 전념해왔다. 추상에서 구상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경향성을 따른 것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달리 말해, 그 전환은 서구적 추상 기법이 단순히 싫어서도 아니고 무시할 만한 것이라고 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조각에 대한 진솔한 태도를 유지함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백현옥은 나무, 돌, 흙, 청동, FRP, 아크릴 등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조각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조각가이다. 이러한 그의 조각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가 재료를 조형적으로 이끌어내고 형상화하는데 특유한 조각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굳이 덧붙이자면, 물론 이 솜씨는 단순히 기법적인 차원에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조각적 솜씨는 무엇보다 재료를 조각미학의 차원으로 변용하는 내재적인 힘에 있다.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작업에서 모색과 실험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재료는 단순히 조각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조각의 본질을 향한 예술적 시도에서 촉발되는 근원적 형식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조각의 재료 하나에도 자신의 조형적 태도를 반영하고, 그 재료를 통해 구현될 원형을 늘 사유한다. 재료는 이제 단순한 물성의 차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겸허하고 소박한 태도를 드러내는 출발점이 된다. 백현옥의 작업에서 재료는 다양한 주제들을 표상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재료를 자유로운 조형적 과정에 활용하면서, 언제나 기법과 주제 그리고 형식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백현옥의 조각적 표상은 여러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겠지만,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서 볼 때 일상과 자연의 조각언어에 상응하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조각과 함께 해 온 삶은 조각으로 일상을 말하고 자연을 드러내는 일, 그것에 천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의 조각은 일상과 자연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의 작업에서 일상과 자연의 미묘하게 섬세한 결들이 조각의 재료를 촉발하고 주제를 형성한다. 삶과 유리된 예술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삶과 함께 있는 그 모든 일상의 빛들 그리고 자연의 빛들이 그의 조각의 본체를 이룬다. 그러기에 일상이 조각이고, 조각이 자연이고, 또한 일상과 자연이 조각에서 홀연히 하나가 되는 조형적 흔적들을 그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로 제작된 그의 많은 작업들은 일상의 미를 조형적 공감으로 이끌어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청동으로 제작된 <가족>(1994)은 그의 가족 연작들 중에서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과 사각형의 근본적인 형태에 그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가족의 단단함을 공감을 이끌어내는 매스와 구조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문화 가족>은 백현옥의 조각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정겨움의 아름다움이 조각적 형태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일상의 조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바로 자연의 모티브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반영되어 있는 일련의 작품의 예로, <발아> 연작들, <소나기>, <발원>, <보리고개>, <투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체 표현에 자연의 형상이 상정되어 있다는 점을 그리 어렵지 않게 가늠해 볼 수 있을 터이다. 자연의 모티브가 어떤 식으로든 이입된 인체 작품의 예로 ‘여인’을 주제로 한 일련의 조각들, <가을의 문>, <바이올린 켜는 소녀>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인체 작품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연의 가장 본래적인 원초적 자연스러움이 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현옥은 일상의 언어를 조각하고 자연의 흐름을 조각적 변용으로 드러내 보여주지만, 동시에 또한 일상과 자연의 융합을 조형적으로 제시하는 조각가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융합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구별해서 논의할 수는 없지만, <여명>, <횃불>, <소우주>, <기우제>, <풍경> 등을 그 예로 들 수는 있을 터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일상과 자연의 융합이 새로운 조각의 형태로 현시되는 것은 그의 아크릴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실상 아크릴 뒷면을 음각으로 파낸 역부조에 빛이 설치된 아크릴 작품들이 이번 모란미술관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아크릴 부조 작품들은 재료를 다루는 그의 조형적 힘과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정신적 힘이 융합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들이고 완성된 것들이다. 아크릴 작업은 일상과 자연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되고, 그것이 조각에서 다양한 재현의 가능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연의 원리를 재현하고 있는 그의 아크릴 작업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하나가 되고,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가 무의미해지고 오직 일상과 자연 그리고 공감과 관조의 정서가 하나의 조형의 빛, 그 예술적 환영으로 오롯이 현현한다. 아크릴 부조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정은 기법적 환영이 아니라 일상과 자연을 빛으로 밝히는 예술적 환영이다. 아크릴 조각은 진실을 매개하는 삶과 세상의 판처럼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일상과 자연이 만나고 빛으로 드러나는 그곳에 백현옥의 조각이 있다.

글_임성훈(미학,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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