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묘사보다 삶의 흔적과 깊이를 헌정한 캔버스 한 폭의 역사
실사묘사보다 삶의 흔적과 깊이를 헌정한 캔버스 한 폭의 역사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5.1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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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의 내면세계를 단 한 장에 축약한 기록예술이 바로 ‘초상화’”
오동희 화가/오동희갤러리 관장
오동희 화가/오동희갤러리 관장

지난 2월 9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된 코엑스 서울국제아트엑스포 2023에서는, 쟁쟁한 작품들 속에 표제 대신 작가의 이름이 심플하게 오른 부스전이 열렸다. 인물의 표현주의가 극대화되고, 내면세계의 대비와 혼합, 축약과 재해석으로 나타난 장르, 초상화 전문화가로만 50여 년 활동한 오동희 화가의 작품은 정치, 종교, 경제, 문화인사들을 아우르며 예술이 역사기록 분야에서 얼마나 활약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걸작들로 이뤄져 있다. 디지털미디어와 금본위 이후 새로운 경제논리에 따라 테크닉과 감수성보다는 개성이 부각되는 시기, 희소가치 강한 보수성과 클래식한 가치를 보여주며 서양화단의 높은 찬사를 받는 오 화가의 작품들을 둘러본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초상화가 평생의 과업, 역사를 예술 공간으로

전시장과 교육, 창작아뜰리에를 겸한 국내 1호 초상화갤러리로 2016년 이전 개관한 반포 오동희갤러리의 관장, 서양화가 중에서도 초상화 전문인 오동희 화가는 개인전 8회와 국내외 단체전, 다수의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붓을 잡은 50여 년 미술인생의 대부분을 초상화에만 바쳐왔다. 한국무역협회 역대 회장단 초상화를 완성했으며, 1년에 걸쳐 천주교 수원교구 어농성지 표준영정 순교자초상화복원과 같은 대작에 강한 오 화가를 상징하는 작품들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초상화 작업이다. 

작가로서 붓을 잡을 수만 있다면 계속 추가할 이 시리즈 외에도,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그에게 공식영정초상화작가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법정스님, 마더 테레사 등 종교 지도자, 반기문 UN사무총장,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정치 거물들도 그의 캔버스에 담겨 있다. 인물화의 실사묘사는 가져오되, 성향과 업적, 인생관까지 얼굴에 담아낸 오 화가의 기법은 종종 플랑드르-부르고뉴 시대 궁정과 왕실, 귀족들의 우아한 초상화를 연상케 한다. 

세월이 지나 이 초상화들은 왕실 영지를 떠나 대부분 미술박물관의 기록예술로 남아 있는데, 최근의 서양미술사조가 파격적인 표현주의에 경도된 상황에서 클래식함을 그리워하는 해외 갤러리들은 이러한 화풍을 계승해 르네상스적 우아함을 가미한 고유기법으로 발전시킨 오 화가에게 열광했다. MIFA아트페어, 까루젤 뒤 루브르 아트페어, 래핀예술대 미술과미평 러시아초대전, 베를린아트센터 개인전에서 유럽 갤러리들은 차분한 데생과 세부묘사가 농익은 오 화가의 초상화로부터 신고전주의의 미래를 보았다. 

한국화와 서양화 기법에 두루 능해, 인체연구 거듭해 세부묘사 탁월

펜 대신 붓을 든 기록예술가, 주인공의 삶을 단 한 장에 요약하는 과업을 이뤄온 고전파 초상화가인 오 화가는 속눈썹과 눈썹, 머릿결의 세밀함을 표현할 때도 동양화 인물표현의 사실주의를 참고해 왔다. 그리고 빛의 각도에 따른 피부의 광택과 볼륨감, 주름의 형태까지 세밀하게 나타내는 것은 서양인물화의 유산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 제약회사 근무시기부터 그는 의약학 지식을 쌓는 한편 인상과 골상학 이론을 연구하며, 근육/골격의 흐름과 같은 인체역학에 다각도로 관심을 가져 자신의 데생을 보다 정밀한 경지에 올렸다. 이번 서울국제아트엑스포에서의 작품들 또한 한국화의 세필선묘에서 배운 화필의 인내, 서양화의 정교한 데생과 실사묘사, 오랜 해부학적 지식이 결합된 초상들이다. 

사람은 마흔 이후로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처럼 상당수의 초상화는 중년 이후에 남겨지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의 희로애락을 눈동자와 입매에 잘 나타내고, 노년의 관록을 눈가와 입가에 담아내는 오 화가는 모든 인종과 연령을 초월해 그릴 뿐 아니라 감정까지 드러내는 프로다. 오 화가는 자신의 사실주의에 대해 “한 인물의 삶의 흔적과 깊이를 나만의 표현 방식으로 한 폭의 그림에 담아본다”라고 고백하며, 어린 시절 동아리활동부터 미술을 택했고 드로잉과 크로키를 반복해도 지치지 않은 원동력인 초상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오동희갤러리에 전시된 초상화들도 얼굴 중 코는 균형과 안정감의 중심, 눈은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작품들이다. 서양화 뿐 아니라 한국화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1999년 작, 수묵채색과 세필 실사가 극대화된 기법으로 비단에 그린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문중 영정초상처럼 세상 밖에서 빛을 발하는 초상 작품들도 많다. 

유럽 궁정화가의 서정적 우아함으로 복원 및 기록초상 분야 주목

르네상스 화가 중 정치종교인물의 세부묘사 장인인 궁정화가 홀바인처럼, 오 화가의 초상화 기법들은 고전적이며 보수적이다. 하지만 근엄한 권위 과시를 덜어내고, 시대상과 인간을 반영하는 색감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아티스트 백남준의 초상도 초로의 모습보다는 현역 전성기 시절의 생생한 역동성을 담았으며, 시벨리우스의 지그시 감은 속눈썹은 음악 대가의 삶을 증명할 만큼 예술적이고, 아이티 어린이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은 일시적인 동정보다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에 입각한 유니크함과 인간미가 공존하는 포드 대통령부부 초상은 이목구비에 표현을 집약시키는 정치경제 인사들의 초상화 기법이 극대화되어 있다. 또한 오 화가의 주특기는 해당 인물의 많은 사진 영상을 검토하며 기본데생을 하고, 자료가 충분치 않더라도 해당 인물의 시대상이 담긴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재현하는 표준영정 작업이다. 

의상과 소품 고증이 탁월하다고 평가받은 500호 대작 구인사 1대 상월 원각대조사 큰스님, 정광수 바르나바·윤운혜 루치아 순교자부부의 영정초상처럼, 그는 고증 능력에 높은 기개와 종교적 신념으로 충만한 삶의 흔적까지 담아냈다. 한편, 60대 만학도로 홍대 미대의 석사과정을 밟으며 서양미술사를 깊이 둘러본 그의 사색적 깊이는 클림트의 초상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인물은 오 화가의 우아한 화풍 그대로이되, 배경도색은 클림트의 색 조합과 화풍을 빌려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현대 서양미술가들이 얼굴을 환하게 표현하며 각도와 주름, 골격구조를 활용해 그린 앵그르와 다비드를 계승하기보다 직설적인 추상과 초현실주의에 빠진 요즘, 오 화가는 서양식 고전의 원본계승에 충실하면서도 신고전주의를 은은한 멋을 대표하는 화가로 전 세계 갤러리에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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