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무, 그리고 조형으로 비울수록 채워가는 ‘깨달음의 미학’
공, 무, 그리고 조형으로 비울수록 채워가는 ‘깨달음의 미학’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4.14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석판화 잉크와 유화 물감 내음에서 배운 추상화”
판화가 홍재연 작가
판화가 홍재연 작가

‘깨달음의 미학’과 <부도> 연작이라는 주제로 석판화에서 유래된 아날로그 프린팅의 궁극을 보여 준 한국 석판화의 살아있는 연대기, 판화가 홍재연 작가가 한층 새로운 추상화로 돌아왔다. 2023년 3월 24일부터 5월 7일까지 겸재정선미술관 ‘겸재 맥 잇기 초청기획전’의 두 번째 예술가로 선정된 그는 이번 <공(空), 무(無), 조형(造形)>에서 추상, 판화, 아크릴화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불교와 노장사상, 몬드리안 식 단순화 추상으로부터 캔버스의 연결로 표현하는 확장되는 작품의 공, 무의 개념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져온 홍 작가의 관점으로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자. 

광활한 깨달음의 영역, ‘공, 무’의 이미지로 나타낸 단순함과 비움

서울에서 파리와 코펜하겐, 하얼빈, 미국을 오가며 개인전 46회, 그룹전 850여 회를 거치며 체육부장관 문화장,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을 비롯해 프랑스, 불가리아, 타이페이 등 해외 유수의 수상경력을 갖고, 영국 대영미술관, 프랑스 AMAC박물관, 주 스위스한국대사관, 중국 흑룡강성미술관 등의 소장작가인 판화가 홍재연 작가는 이 화려한 경력보다 8년 전 출간한 1천 2백여 점의 셀프 전작도록을 자신의 업적으로 꼽는다. 평생의 대업을 이루고 새로운 시도에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원동력은 그의 ‘비움’ 철학 덕분인데, 무언가를 내려놓으면 자연히 채울 여유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글저서도 물감도 관련학과도 없던 시절부터 국내 석판화 분야를 개척해, 미니멀 아트에서 숲속 자연요소까지 충분히 경험한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도하는 현재의 주제인 ‘깨달음의 미학’에 다다른다. 그리고 스님의 입적 현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부도>를 주요 테마로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철학의 노장사상과 부처의 법문으로부터 얻은 ‘공, 무’를 이번 주제로 선보인 것도, 거창한 사유에서가 아니다. 깨달음의 개념은 너무 광활해 축소시키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 선정한 것”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와 도가사상에 따르면 과시는 결핍이요, 채움의 전제는 비움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수래 공수거’를 의미하는 공, 노자가 도를 넘어선 덕으로 숭상한 공은 일맥상통하여, 무위자연의 요소이자 만물이 시작되는 무를 통해 색을 채우는 창작행위가 시작된다는 맥락으로 보면 된다.

변화하는 석종의 이미지, 현대 추상 식 단순화의 도움으로 풀어가

온실의 꽃보다 바위틈 야생화의 형상을 아름답게 보고, 거대석불보다 이끼 낀 무명스님의 60cm 석조 부도에 감화된 홍 작가는 내면의 깨달음이 얼마나 광활한 영역인지를 잘 안다. 그래서 공과 무 역시 사람들의 의식과 개념에 따라 좌우되는 요소로 보며, 몬드리안식 추상의 핵심인 단순화에 주목해 평면에 비울수록 채워지는 작업을 한다. 캔버스 작업 또한 공과 무의 비움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장되는데, 그가 즐겨 쓰는 방식은 30호 캔버스를 위아래로 접합해 위아래로 긴 화면을 만들고, 산갈대를 잘라 밑그림 형태로 만든 후 자연스럽게 캔버스 효과를 내도록 거즈붕대로 감싸 아크릴 접착제로 고정시킨다. 틀 안에서 질감을 낼 때는 인테리어의 재료를 사용해 가로세로 기하학적 바탕무늬를 내며, 전체 색조 도색은 아크릴물감으로 대체해 체력 소모를 줄인 만큼 더 많은 시도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석종의 형태도 점차 단순화되어 메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붓의 필법이나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처럼 직관적인 붓터치는 그가 여전히 회화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리는 석판의 영향권에 있음을 볼 수 있다. 판화 초기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석판기 잉크냄새는 옛 을지로입구 인쇄소 자리처럼 흐릿해졌어도, 그대로 전사되는 인쇄기로 거울처럼 좌우가 반전되는 석판기법만큼은 손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닮은 듯 다른 선과 원의 형상들은, 대칭 이상으로 단정하게 각이 잘 잡혀 있다. 현대추상의 파편 같은 불규칙성 대신 판화의 정체성이 뚜렷한 그의 작품들은, 색과 구성이 조금씩 다를지언정 이러한 형이상학적이되 정갈한 공식만큼은 자필 서명처럼 잘 유지되어 있다. 

유화는 석판의 제약 넘어선 대안, 종교 이상의 깨달음·메시지 원해

“깨달음은 종교사상이나 열반 같은 큰 개념보다 알아가는 만족감, 작은 행복에서도 나온다. 빌 공(空)은 비움 뒤의 단순화도 의미하기에, 깨달음을 전하는데 복잡한 공간이나 낯선 사상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홍 작가는 판화종이를 구하지 못할 때부터 대안을 찾는 데 익숙해서, 요즘도 예술가의 황혼을 준비하는 대신 캔버스 작업은 물론 석판보다 체력을 절약할 수 있는 물감 작업에도 물이 올랐다고 전한다. 천 작업 또한 대형 캔버스 작품의 해외전시 수송이 까다로워 돌돌 말 수 있는 천의 특성을 이용했고, 대형 캔버스는 필요하면 2개에서 수십 개까지 모아도 하나의 작품을 이룰 수 있는 개념으로 제작하고 있다. 그래서 바로크음악이 표제보다 주로 고유번호로만 불리듯, 이번에 볼 수 있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Work’라는 이름 아래 번호로만 구분하는 작품들을 주목할 만하다. 특히 <2071>에서 <2102>까지 이어지는 직선형상의 율동을 보노라면, 같은 모티브로 색과 패턴에 조금씩 변화를 주며 경쾌한 원색으로 반복되는, 원과 긴 직선의 메시지가 보인다. 또 “쓸데없는 사담보다 서양추상 이미지처럼 친숙한 형상을 연계해 풀어나갔다”는 그의 말처럼, 그가 난해한 추상이라는 선입견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졌음을 느끼게 한다. 큰 캔버스보다는 연결한 캔버스, 잉크 대신 서양화 물감. 금빛으로부터 맑은 원색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한 홍 작가는, 이러한 대안들로 “추상화를 너무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고자 한다”는, 곱씹어 보면 가장 어려우면서도 단순한 창작자의 자세를 말한다. 그러니 불확실한 요소도 창의성으로 수렴하는 AI와 챗GPT의 시대인 요즘, 구상미술의 복제와 비구상의 자유연상적 추상을 모두 경험한 내공으로 상념의 실체를 그려 보이는 미술가의 존재는 앞으로도 우리가 이들을 소중히 여길 근거가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