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화판의 공간 개념에 시간과 소리 남기는,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
목재화판의 공간 개념에 시간과 소리 남기는,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4.1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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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소재에 초현실기법과 뉴미디어 정신 더한 시각으로 본 매화”
여산 이군우 화가/K-art M연구소 대표
여산 이군우 화가/K-art M연구소 대표

<화광매보>가 남긴 취상설의 규정에 따르면, 봄의 상징이자 불멸의 매화를 그릴 때는 ‘정/체/점/향/출/지/수/결/변/종’의 10순을 따르게 한다. 그리고 화공이 아닌 글 짓는 문인들을 위해 이 개념을 목판화의 발전에 따라 재현한 <매화희신보>의 삽화 덕에, 선비들의 붓은 절개의 화풍을 더했으며 조선의 화폭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이 남송묵매화의 꽃 생육과 시기, 꽃망울과 꽃술이 드러나는 형상들은 후대에까지 널리 전승되었다. 달과 매화를 사랑하는 한국화가, 여산 이군우 화가의 매화는 소재를 잘 활용한 한국화의 새로운 심미안적 상징이다. 보름달 앞 일지매와 고결한 백·청·홍·황매의 자태에 낮에는 지순함을, 밤에는 신비함을 더하는 2가지 기법을 구현하여 현대미술의 기발함에 전통문화의 가치를 내면화한 그의 화풍을 소개한다. 

<2023 여산 이군우 초대전>, 매화의 밤낮을 알리는 아름다운 반전

조선시대 중국수묵회화의 영향을 받은 진채화의 후예, 자연의 미학을 상징하는 사군자 ‘매화’를 그려 겨울서리를 뚫는 설중매가 봄의 일지매로 넘어가는 시간의 섭리를 다루는 여산 이군우 화가가 3월 13일부터 25일까지 수원아트갤러리 라포애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대학원 동양화가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개인 초대전 및 요르단 시립미술관, 프랑스 엑스국제미술살롱전 등 국내외 아트페어까지 550여 회 전시경력이 있는 이 화가는 2021 한류문화원특별초대전 초대작가, 제4회 앙데팡당KOREA국제예술제대상(서울특별시장상)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지녔다. 만월과 매화를 사랑하며 순지, 장지, 목판에 칠보, 황토, 야광 안료 혼합재료로 채색하는 기법의 이 화가는, “구하기 좋고 보존하기도 쉬워 자연재료를 선호한다”며 소재에서도 자연의 ‘영속성 체화’를 고심하는 작가다. <일월오봉매화도>처럼 장대하고 기백이 넘치는 대작과 <월. 매화향기>처럼 달토끼 그림자의 궤적이 은은한 그림을 동시에 그리는 이 화가의 시그니처 소재는 매화다. 

그에게는 1993년부터 세기말의 부적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을 현대인의 애환에 녹이거나, 패각을 수묵채색에 응용하며 전통과 자연의 콜라보를 추구하는 표현주의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2001년경부터는 경남 밀양에서 창문 밖에 피어난 매화를 보며 자라난 기억과 함께, 매화의 형상표현에도 변화와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마른 나뭇가지에 꽃을 피워내는 자연의 경이와 신비를 담고자 매화의 순간을 영원으로 기록하는 <매화희신보>의 화풍을 계승하되, ‘야광’의 안료라는 기발한 소재로 자연의 신비인 밤·낮을 재현한 것이다. 홍매와 황매를 백매와 청매로 반전시키는 야광의 술수로써 한 장의 그림으로 밤낮이 다른 두 얼굴을 표현하는 그의 기법이 쉽게 와 닿는 이유는, 그림에서 자연의 색감과 소리를 아날로그 소재로 크로스오버하는 도전 속에서 주제의식을 또렷이 했기 때문이다. 매화가지 끝에 보름달이 걸린 밤과 낮을 단 한 장의 그림 속에 윤슬과 비단의 광택처럼 공존시킨 그는 “주야경의 외면과 내면”이라 할 만큼 칠보를 활용해 다채로운 색감을 내는 한편, 급변하는 시대의 인간사를 디지털시대 네트워크 속 광소자에 비유할 줄 아는 관점도 가졌다. 

칠보와 야광안료, 목판에 크로스오버로 피어난 남송매화의 영롱함

이처럼 전통한국화에 천착할 요소가 충분한 자연친화적 진채화 화풍과 소재를 따르면서도, 이 화가는 10년 전부터 자신의 한국화 공식을 특수목적의 장르예술이자 초현실적인 디지털-뉴미디어아트/콘서트와 크로스오버시켜 메시지의 다양화를 강조해 왔다. 엄정한 규칙 정립이라는 본래 의도와 달리 <화광매보>의 활자화 이후 남송묵매화의 다양성을 더 도약시킨 <매화희신보> 목판인쇄본의 행보를 생각하면, 종이 대신 목판을 캔버스 삼아 매화를 야광도색하며 고전의 영원성과 첨단요소의 공존을 상징할 수 있음을 현대인들 앞에서 입증하는 그의 작품관은 매우 흥미롭다. ‘화판’이라는 공간적 개념에 소리라는 시간적 개념을 공용할 수 있는 ‘미디어 통용예술’을 예고하는 자신감도, 고전의 정서에 대한 기본기가 충분하기에 나올 수 있는 도전이다. 수묵채색의 배경을 몰골법으로 채운 그의 그림에는 세필법으로 은근히 표현한 토기와 분청사기도자 속 매화의 자태, 일체의 감필 없이 자연물의 골인 옹이와 껍질까지 실사화한 구륵법처럼 전통의 메시지가 다분하다. 

한 편으로 두 장의 효과를 낸 또 다른 작품인 <월. 매화> 또한 야광안료를 또렷이 도색하기 위해 불을 끄고 4회 정도 덧칠하는 기법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전통의 향수에 ‘개성’을 덧입혀 시각효과와 메시지를 넣은 ‘현대의 문인화’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보면 그림을 시작하기까지 묵상하는 시간만큼 심상을 표현하는 수작업 또한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편으로는 동서양의 혼재양상도 보여주는데, 격자무늬의 장지문 배경, 구름에 가려지는 대신 마그리트의 근대 화풍처럼 공중에 몽환적으로 떠 있는 매화나무의 진경을 은유한 추상화풍은 담대함 속의 담백한 맛이 있다. 또한 화면 속에 드문드문 솟은 매화는 만개하여 전통의 꽃술과 꽃눈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꽃잎 다섯 장만으로 단순화 된 일월오봉도 속의 매화 문양은 인내와 절개를 상징하는 동백꽃을 사뭇 닮아 동양의 정서가 서양에도 어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매화는 계절 따라 피는 꽃이지만 매화 그림은 사람의 의지대로 개화한다”라는 대원칙을 지키면서도, 전통문화가치의 영원불멸함과 예술의 심미안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한 그는 “영원한 작품에 대한 연구는 작가생명의 원천”이라는 언급과 함께 매화를 피워내는 자연의 본질을 관찰하는 의지가 바로 창작의 원동력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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