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지 않은 통찰로 무수히 싹 틔울 씨앗을 뿌린 대담함
길들여지지 않은 통찰로 무수히 싹 틔울 씨앗을 뿌린 대담함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2.10.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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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앵포르멜의 추종자가 아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그림체의 이우섭”
서양화가 이우섭 화가
서양화가 이우섭 화가

강렬한 원색으로 계획된 드리핑, <Trace> 연작으로 눈길을 끈 이우섭 화가가 오는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인사동갤러리 라메르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청과 적의 단순한 드리핑이 반복된 발자취로 예술의 아름다움은 부연설명보다 직관에서 나올 때 더 진실함을 보여준 이 화가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논지의 묵직함마저 드리핑으로 흩뿌려 감상 과정에 끼어들 무게감을 가볍게 덜어 냈다. 화가 이전에 오랜 미술 애호가로서 국내 화단의 반추상과 앵포르멜의 복잡한 실존주의가 명멸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봐 온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즉흥성과 격정이 켜켜이 쌓여 생긴 언어의 과잉과 미사여구의 테두리를 과감히 깬 ‘흔적(Trace)’ 연작들로 오래 관찰해서 얻어낸 귀중한 결론, 현대미술감상의 진솔한 의미를 말한다.

그림의 해석은 보는 이의 몫이라, 하나의 색도 다르게 읽힌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과정에는, ‘듕귁의 글자가 우리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함’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갑오개혁 이후 밀어닥친 서양미술사조를 받아들이던 미술계에도 있었다. 서양의 도구와 재료로 나타낸 이야기이니 자연히 번역 툴이 붙어야 했고, 우리의 정서는 만연체와 중역 사이에서 서양의 철학과 어조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그림을 읽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10대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청년 시절 건축을 전공해 SUBI디자인의 대표가 되고 42년에 걸쳐 활동하다 2018년 말 화가라는 늦깎이 데뷔를 한 이우섭 화가는 이 지점에서 ‘추상화’의 작가주의와 감상하는 일반인들 간의 ‘사맛디 아니함’을 보았다. “들판에서 꽃을 처음 볼 때 학명과 생육은 학자들의 몫이고, 예뻐서 감탄하는 건 보통 사람들의 몫이다”라는 그는, 추상의 해석을 개개인에 맡기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균형과 정밀을 겸비한 도면을 그리는 삶 속에서도, 그는 오랜 세월 인사동을 줄기차게 방문하며 국내 그림시장의 흐름을 지켜봐 왔다. 자칫 ‘도라지 위스키’의 운치에 취해 진짜 몰트위스키의 향을 잊어버리듯, 미술의 고답성이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릴 수도 있다고 믿는 그는 한창 때는 매달 그림 1천 4백여 점을 눈에 담으며 그림에서 작가의 정신자세를 읽는 습관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테인리스 스틸 위 투톤의 다홍으로 나타낸 곡선의 일부 궤적, <Lamborghini 변형사이즈>에서는 국내 단색추상거장들이 보여준 종류와는 다른 패기가 느껴진다. 이 화가는 바로 이 점이 자신의 그림에 담긴 지문이며, 상징과 은유를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고 느끼는 만큼 감상을 남기는 다양성이 추상화만의 묘미라고 한다. 

그림의 ‘ㄱ’도 몰라도 사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진짜 그림의 본질
소위 ‘무학의 통찰’도 사실은 오랜 숙고에서 태동하는 법이다. 홍대 재학시절 같은 강의료라면 미술보다는 건축학이 실용적이라는 선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이 화가의 눈에는, 미술이 아카데믹한 꽃길을 걷고 공모전의 훈장을 달면서 ‘등업’을 반복하는 것도 마치 알곡의 도정이 과하여 영양 많은 현미가 윤기만 흐르는 백미로 변하는 것으로 보였다. <Trace> 연작은 해바라기와 사군자, 과일만 평생을 그려 온 화가들의 구상이나, 한지로 서양화를 실험하고 단색추상과 파격적인 기법으로 대중성을 얻은 작가들의 추종자를 마다하는 이 화가의 단호한 작가주의의 결실이다. 뿌림 기법은 같은 액션 페인팅 계열인 불어서 만든 기법과 일견 구별이 가지 않아 작가적 상상력을 작가노트로 곁들여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 화가는 모작을 도둑질에 비유한 중학교 은사 김종식 선생의 충고대로 직관적인 감성, 그냥 존재만으로도 이끌리며 아름다운 자신만의 방법론을 찾아 이 세상에 하나뿐인 흘림 기법으로 무수한 창의의 씨를 퍼뜨렸다고 한다. 숨통이 트인 후에는 마치 양식장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졌고, 흔적을 뿌린 공간은 직선 혹은 곡선의 궤적을 정해 주었지만 그 흔적들이 머문 캔버스를 액자에 넣어 가두지도 않았다. 이러한 ‘자연산’ 그림들의 생생한 내음에 굳이 미사여구가 필요하며, 소리에 캡션이 또 필요하냐는 반문이 이 화가가 <Trace> 연작들을 내놓으며 남긴 작가노트의 전부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읽을 때는 점면추상과 단순추상의 용어를 몰라도 되고, 앵포르멜이 진화를 거듭하다 마치 운석을 맞은 공룡처럼 모노크롬에 휩쓸려 사라진 비화에 슬퍼할 필요도 없다. 작품의 원작자인 그가 이런 관점을 흔쾌히 허락했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듯, 흐르는 물감도 복잡한 추상 푸는 열쇠 되어
미술을 철학과 취미로 삼다 팔순을 넘긴 지금, 이 화가는 공모전에서 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닌 그림과 자신 사이에 느껴진 운명의 붉은 실로 인해 화가가 되었다. 사업을 마무리할 무렵 자연스럽게 물감을 만지게 된 그에게, 다른 화가의 기법을 복제해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순간은 없어 보인다. 대신 이 화가에게 필요한 연료는 정신적인 부분에 있다. 복잡한 추상을 풀어내는 노하우에는, 어쩌면 생략이라는 대담한 무언(無言)의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감상자 입장에서 그림의 시대사조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구상과 반추상, 추상으로 진화해 온 동년배 화가들과 달리 바로 액션추상으로 넘어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 하지만 예술은 녹은 얼음이 봄을 불러옴을 안다. 작가는 그걸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화가는 지난해 1회 전시의 20점보다는 다소 적은 15-18점을, 다양한 흐름의 흔적이 담긴 1백호-30호 규모들로 소개하려 한다. 이발소 그림이나 크리스마스카드 그림처럼 우리 곁에 친근한 그림도 좋지만, 세포의 일부 같은 점묘추상과 수많은 우연성 액션기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법으로 나타낸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하나의 그림, 그것이 이 화가의 그림이다.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이러한 그림에도 호당 1백만 원 선의 가치가 매겨질 수도 있지 않은가. 중국의 표의문자를 가장 먼저 버린 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 언어를 만든 왕으로 기록되었듯, 추상의 새로운 언어를 보여준 이 조류가 현대미술과 추상화에서 100년 후 후손들에게 NFT도 이루지 못한 그림의 심상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10월 12일부터 라메르 개인전에서 펼쳐질, 이 무심하고도 새로운 추상의 성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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