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우고, 이내 덮어 올려 채우는 마음수양으로 이룬 열린 시각
나를 비우고, 이내 덮어 올려 채우는 마음수양으로 이룬 열린 시각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1.09.16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수 처리된 한지에 일필휘지의 번짐 대신 상념의 중첩을 보여주겠다”
목현 김수린 작가/김수린문인화연구소 원장
목현 김수린 작가/김수린문인화연구소 원장

예술은 중첩이고 반복이다. 천재로 알려졌지만 ‘1만 시간 숙련도의 법칙’에 따라 수천 장의 종이에 손이 배기도록 작업했던 예술가가 어디 한둘이던가. 시서화가 공존하는 문인화의 다양한 장르와 메시지성이 끝없이 창조하는 자신의 기질에 맞아 15년 간 문인화를 해 온 목현 김수린 작가도, 자신의 예술을 ‘반복적 예술행위를 통해 참된 자신, 자성(自性)을 깨닫는 시간’이라 말한다. 이제는 틀에서 벗어나 그동안 중첩된 숙고의 결과를 새로운 양식으로 증명하기를 바라는 김 작가는, 화선지의 속성인 평면적 횡렬의 전이와 번짐으로부터 서양화적 기법인 종렬의 중첩을 증명하고자 또 다른 작가주의적인 수양에 다각도로 전념하는 근황을 전해 왔다.

폭포처럼 채움과 비움, 그리고 다시 채움이 공존하는 수양의 메시지

폭포는 무협소설이나 영화에서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도리와 자아를 깨닫는 수양의 대표적인 클리셰이자, 봄이나 가을과 다른 여름의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동양화에서 선호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문인화가 목현 김수린 작가는 매난국죽 사군자에 자신을 대입하는 여느 문인화가와 달리, 자신을 작품이라는 끝없는 자기정화와 정신수양에 임하는 ‘자성’을 지닌 존재에 비유한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태도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자연물로 김 작가는 여름의 폭포를 가장 먼저 꼽는다. 그래서 그는 문인화를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종이에 글과 그림을 올린다기보다는 자신을 비우고 수묵으로 채우며, 그 수묵을 다시 그림으로 옮기면서 비워진 자신을 붓을 들어 다시 채우는 과정이 한지에 먹과 색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귀납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행복을 발견하는 그의 예술은 어릴 적 전업화가의 자질을 지녔다던 평가를 뒤로 한 채 생업을 선택하면서 취미로 연명하는 데서 끝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속, 정확이 생명이자 연봉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규칙적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바쁜 일상보다 청명하게 내리쬐는 문 밖의 햇살이 더 가치 있게 느껴져 퇴사하고 문인화를 하면서부터 그의 예술은 현재의 형태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김 작가는 사군자는 물론, 목단, 파초, 연꽃, 목련 등 현대 문인화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십군자를 한다. 달항아리의 여백을 사랑하며 십군자의 한적한 명상을 담채로 표현하는 기법은, 저명한 수묵담채 문인화가 석경 이원동 선생의 문하에서 갈고 닦은 시서화 수련 덕분이기도 하다. 

한지의 흡수와 우연성 대신 퇴적과 중첩으로 한결 새로운 문인화 접목

대구미협 문인화대전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대구아트페스티벌, 대구스프링아트쇼 등에 참여한 김 작가의 그림은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의 구분이 선명하며, 흰색이 아닌 하늘빛과 노란색으로 채웠으면서도 여백의 공간미를 보여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문인화에는 45도 각도로 늘어진 매화의 붉고 고운 자태와 화면을 가득 메운 달항아리도 있지만, 각자의 경계를 유지한 채 희미하게 아웃포커싱 된 풍경, 십군자 식물의 고고한 생동감, 달빛 아래 점과 선과 곡선으로만 표현된 나무와 꽃, 달의 심플한 조화도 있다. 또한 김 작가는 지난 15년 간 개인전은 단 2회만 했을 정도로 상념을 모으고 작품에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신중파로서, 한국화의 미덕이자 일필휘지의 에너지를 응축할 수 있는 정석인 오랜 묵상의 반복, 그리고 여백의 미가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문인화의 기본 공식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리고 새로운 습작에서 깨달음을 얻은 김 작가는 여기에 더욱 새로운 문인화 개념을 추가하려 한다. 올해 들어 그는 이런저런 시도 속에서, 그간 문인화의 토양을 적셔오던 농묵 대신 특수처리 된 한지에 색을 겹겹이 쌓는 대안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술을 위해 기존의 정통적 문인화 스타일과 창작을 향한 반복적 행위는 지속하되 추구하는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는 그는, “한국화는 반복이요, 서양화는 중첩이다. 잦은 파도와 밀물, 썰물로 토사가 흐르고 번지는 해안가가 동양화라면, 덧바른 색의 질감과 중첩으로 쌓이는 지층은 서양화이기에 이들은 같은 땅이면서도 다르고, 또 어딘가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부터 이 새로운 형태의 수묵담채 문인화를 시작했다는 김 작가는, 다시금 난을 치고 글귀를 적던 입문자 시절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있다. “예술가로서 나는 여전히 미완이며 일필휘지에도 새로운 방향성이 있기에 이를 입증하려면 또다시 수천 장의 종이, 수만 번의 일필이 필요할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는, 앞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문인화와 일련의 개인 작업을 하는 한편 후학들에게는 문인화에 쉽고 편안하게 접근하도록 하는 소명에도 충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