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순간은 때로 너무 작아서, 그 순간에는 그것이 운명인지조차 알 수 없다. 누군가를 향해 건넨 짧은 한마디, 잠시 멈춘 발걸음, 따뜻한 밥 한 그릇이 한 사람의 삶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1988년 11월 11일,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신학대학원 졸업반의 한 청년도 그랬다.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려던 최일도는 눈앞에서 한 노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기차 시간이 임박했다. 누군가는 돌봐주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 아침의 그 노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그제야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 드셨어요?” 돌아온 것은 희미한 한마디였다. “아니….”
최일도 목사는 훗날 그 순간 내면에서 들려온 양심의 소리가 자신이 평생 결어야 할 사명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날 한 사람에게 건넨 밥 한 끼는 청량리역 광장의 라면이 되었고, ‘밥퍼나눔운동’이 되었으며, 오늘의 11개 나라 20개 분원이 있는 다일공동체가 되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일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로, 돌아갈 곳 없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키는 일로, 다시 해외 빈민촌 아이들에게 배움과 꿈을 건네는 일로 이어졌다.
그렇게 38년. 1,500만 그릇이 넘는 밥이 사람들에게 건네졌고 ‘꿈퍼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숫자만으로 다일공동체의 시간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밥이었지만, 지키고자 했던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존엄이었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밥에서 시작해 한 사람의 생애를 품는 공동체로. 최일도 목사와 다일공동체가 지나온 길에는 오늘 우리 사회가 잊고 있던 오래된 질문 하나가 놓여 있다. 우리는 과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가.
쓰러진 노인 앞에서 멈춰 선 한 청년, 그날의 밥 한 그릇이 38년의 길이 되다
최일도 목사가 처음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거대한 공동체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기관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천만 그릇 이상의 밥을 나누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그의 앞에 그저 배고픈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한 노인에게 진지를 대접하자 또 다른 노숙인과 무의탁 노인이 보였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버너를 놓고 라면을 끓였다. 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은 일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게 했고, 그렇게 이어진 만남은 결국 다일공동체와 나눔의 공간으로 자라났다.
최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은 결과’였다.
물론 38년의 시간이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오해와 비난도 있었다. 행정기관과 갈등했고 공동체 내부의 아픔도 겪었다. 자신의 한계 앞에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최 목사 역시 수없이 생각했다. “이제 그만하자. 여기까지면 됐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이대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 기회에 다시 거듭날 것인가?”
그 질문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부터 찾아와 쌀을 씻는 사람, 수백 명의 먹을 밥과 반찬을 만들며 땀 흘리는 사람, 어르신에게 “맛있게 드세요”라며 밥을 건네는 사람,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매달 후원금을 보내온 이름 없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최 목사는 밥퍼를 39년 가까이 지켜온 가장 큰 힘을 자신의 신념이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들의 헌신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헌신 위에 또 다른 사람의 헌신이 포개지고, 한 그릇의 밥 위에 또 다른 사랑이 더해졌다.
어쩌면 다일공동체의 역사는 한 명의 영웅이 써 내려간 이야기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잠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 누군가의 밥 한 끼를 1500만 그릇이 넘을 때까지 지켜낸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 최 목사는 여전히 1988년 청량리역으로 돌아간다. 그날 자신이 외면할 수도 있었던 한 사람. 다일공동체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돌아가야 할 원점은 언제나 그곳이다.
배고픔보다 깊어진 외로움, ‘밥퍼’가 오늘도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
3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은 많이 달라졌다. 거리의 풍경도, 빈곤의 얼굴도 변했다. 초창기 밥퍼를 찾는 사람의 대부분은 노숙인이었다. 오늘 하루 한 끼를 어디에서 해결해야 할지 막막한 이들에게 밥은 말 그대로 생존이었다. 그러나 지금 밥퍼를 찾는 사람의 80% 이상은 홀로 사는 쪽방 어르신과 홀몸 어르신들이다.
오늘의 허기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건넬 사람이 없는 외로움,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아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고독과 노인이 되어 봐야 겨우 짐작할 수 있는 쓸쓸함이다.
최 목사가 ‘관계적 빈곤’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한국인에게 밥은 유난히 특별하다. 우리는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니?”라고 묻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밥 한번 먹자”고 말한다. 한 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는 행위를 넘어 서로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오래된 방식이었다.
밥퍼에서 한 끼의 밥은 그래서 음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르신, 오셨어요.” “오늘은 왜 늦으셨어요.” “어제 안 보이시던데 어디 아프셨어요.”
평범한 이 몇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아직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
6년 전쯤 밥퍼에는 늘 환하게 웃어 ‘스마일 할머니’라 불리던 이종순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밥퍼 부본부장이 직접 찾아갔지만,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 뒤였다. 가족도, 장례를 맡을 사람도 마땅치 않아 다일공동체가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 죽음은 밥퍼에 깊은 질문을 남겼다. 사람이 죽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알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외로움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최 목사가 바라보는 고독사는 죽음의 방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관계에서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징후다. 그래서 그는 사후의 통계보다 ‘고독해지기 전에 발견하는 예방복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첨단기술도 필요하고 제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최 목사는 “고독사를 막는 가장 강력한 장치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돌봄이요.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믿는다.
밥 한 끼가 안부가 되고, 안부가 관계가 되며, 관계가 때로 한 생명을 붙드는 사회 안전망이 된다. 그래서 오늘의 밥퍼는 무료급식소를 넘어선다. 누군가가 오늘도 자신을 기다리는 곳. 밥퍼가 ‘사랑방’이어야 하는 이유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경계를 허물다, 환대가 되찾아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발견
다일공동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환대’다. 최 목사가 말하는 환대는 친절보다 깊다. 불쌍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시혜도 아니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당신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밥퍼의 오래된 가족 가운데 이차술 씨가 있었다. 그는 17년 동안 노숙생활을 했다. 거리에서 밥을 나누던 초창기부터 밥퍼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노숙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다시 14년 동안 밥퍼의 봉사자로 살았다. 매일 앞마당을 쓸고 새벽같이 일어나 쌀을 씻었다. 틈틈이 떡을 만들어 얻은 작은 수입마저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내놓곤 했다.
세상은 한때 그를 ‘노숙인’이라고 불렀지만 최 목사의 기억 속 이차술 씨는 “누구보다도 고상한 어른”이었다. 고상함과 천박함의 차이를 최 목사는 이 한마디로 말해준다. “청와대 사는 분도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온 국민이 천박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청량리 밥퍼에서 진지를 드시는 무의탁 노인도 이타심으로 살면 고상한 인격이 되어 감동을 줍니다.”
그의 삶은 묻는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가. 어제 밥을 얻어먹던 사람이 오늘 쌀을 씻는다. 오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내일은 더 힘든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일방적인 수혜자라 부를 수 있을까.
다일공동체에서는 봉사하는 사람과 봉사받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한쪽에는 베푸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불쌍한 사람이 있는 구조를 거부한다. 그들은 한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이웃이다. 이는 복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가난 자체가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다.
누군가는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가족과 헤어질 수 있으며, 병들거나 늙을 수 있다. 경쟁에서 조금 늦어질 수도 있고 밀려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 가난해졌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존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 목사는 밥퍼를 ‘혐오시설’이라 부르는 시선 앞에서 아픔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곳에는 위험한 물질도, 폐기물을 처리하는 시설도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내고 외로운 사람에게 말벗이 되어주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도 한때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이 도시를 위해 일했던 평범한 이웃이다.
“가난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입니다.” 그의 말은 우리 사회의 품격이 어디에서 드러나는지를 되묻는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얼마나 높아졌는가가 아니라 그 빌딩 아래 가장 힘없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한 사회의 진짜 높이일지 모른다.
가장 낮은 곳을 지키기 위한 4년의 시간, 복지와 행정 사이에 던진 질문
38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지만 그 길이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밥퍼 건물 증축을 둘러싼 행정기관과의 갈등은 최 목사와 다일공동체에 특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서울시의 고발 이후 ‘좋은 일을 한다고 법을 어겨도 되느냐’, ‘허락 없이 건물을 증축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최 목사가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30년 넘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 활동해 온 공동체가 하루아침에 ‘불법을 저지른 단체’처럼 인식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법적 공방은 4년간 이어졌다.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밥퍼 측이 최종 승소했다. 최 목사는 이 판결을 한 민간단체의 승리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땅의 민간복지와 단체와 행정기간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동역’이다. 행정에는 법과 제도, 예산과 공공성이 있다. 반면 민간복지 현장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신뢰와 배려와 존중이 있다.
행정은 서류를 먼저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지 현장은 사람의 눈빛을 먼저 본다.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가족이 없어서, 혹은 행정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도와 제도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온 사람들을 현장은 항상 먼저 만나왔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를 통제하거나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제도가 미처 품지 못한 사람을 함께 찾아내는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최 목사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협력의 중심에는 기관의 이해관계도, 정치도 아닌 ‘인간의 존엄’이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밥퍼를 둘러싼 논쟁은 한 무료급식소의 존폐를 넘어선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도시의 한복판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낼 것인가. 우리의 행정과 복지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다일공동체가 지난 4년 동안 견뎌낸 시간은 결국 우리 사회에 그 질문을 남겼다.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한 생명을 품는 공동체를 향하여
다일공동체가 걸어온 길을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거대한 복지 네트워크처럼 보인다. 밥퍼가 있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다일천사병원이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한 다일작은천국이 있고, 해외 빈민촌 아이들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호프스쿨과 ‘꿈퍼’가 있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에서 노년의 마지막까지 존엄을 지키기 위한 다·평·인(다일평화인권연구소)와 다일숲속요양원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최 목사는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설계된 사업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배고픈 사람이 있어 밥을 나누었다. 그런데 밥을 먹으러 온 사람이 아팠다. “이분을 치료할 곳이 없네. 어쩌지?” 그 질문에서 다일천사병원이 시작됐다. 치료를 마친 사람 가운데 돌아갈 집이 없는 이들이 있었다. “이분은 어디에서 쉬어야 하지?” 그 질문은 다일작은천국으로 이어졌다.
해외 빈민촌에서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만났다. 한 끼를 주는 것만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밥을 퍼주는 ‘밥퍼’에서 꿈을 퍼주는 ‘꿈퍼’로 나아갔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해외빈민촌에 다일호프스쿨을 세웠다.
그 모든 길을 관통하는 다일의 정신이 있다. ‘지여작할나.’이다.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실천한다는 다일의 영성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언제나 거대한 곳에서 시작될 것 같지만, 최 목사의 38년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쓰러진 한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곁에 머무르다 보니 또 다른 한 사람이 보였다.
밥퍼는 배고픈 몸을 돌보고, 천사병원은 아픈 몸을 치료한다. 작은천국은 갈 곳 없는 사람에게 안식처를 내어주고, 호프스쿨과 꿈퍼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건넨다. 다일숲속요양원과 다·평·인은 한 인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권이 유린되지 않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을 지킨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래서 최 목사가 꿈꾸는 다일공동체의 미래는 시설을 더 많이 세우거나 규모를 키우는 데 있지 않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일하고, 늙고, 병들어 마침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삶의 어느 순간에도 버려지지 않도록 곁에 있는 것. 한 끼가 필요한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인간답게 서로가 지켜주는 돌봄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최 목사는 다음 세대에게도 거대한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나누겠다고 미루지 말라고 한다. 돈이 없다면 시간을 나눌 수 있고, 시간이 없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눌 수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외로운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역시 나눔이요 돌봄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38년 전 청량리역의 풍경도 그러했다. 한쪽에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젊은 신학생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하루 종일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무의탁 노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삶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대로 지나쳤다면 영원히 만나지 않았을 두 개의 인생길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을 연결했다. 그리고 그 연결은 한 그릇의 밥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1,500만 그릇이 넘는 밥이 되었다. 병원이 되었고 안식처가 되었으며 꿈퍼교실이 되었고 요양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수많은 사람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공동체가 되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이처럼 소박한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것. 오늘 보이지 않는 사람의 안부를 한 번 더 묻는 것. 누군가를 불쌍한 사람으로 내려다보는 대신 같은 밥상에 앉을 이웃으로 바라보는 것.
그렇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기억하는 사회라면, 가난은 존재하더라도 가난 때문에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사회는 아닐 것이다.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 다일공동체의 38년은 그래서 ‘나눔’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무시당하지 않고 잊히지 않게 하는 것. 아무도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오래된 진실을, 말이 아니라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증명하는 것.
청량리의 밥상은 오늘도 그렇게 차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