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한 디자인 트렌드가 빠르게 흐르고, 수도권 중심의 건축 시장이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지역에서 진득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건축사사무소들이 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주)이을건축사사무소’ 역시 그 중 하나다. 대형 건설사들과의 협업부터 공공 설계공모까지, 묵묵히 지역을 기반으로 건축의 진심을 쌓아온 권오섭 건축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대구로, 그리고 이을건축의 시작
권오섭 건축사는 영남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뒤,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지역에 기반한 설계사무소를 열었고 그렇게 11년째 지역 건축사로 지역 건축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잘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나만의 색을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지역으로 내려오면 내 이름으로 설계할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 싶었죠.”
사무소 이름인 ‘이을’은 특별한 의미를 담기보다 그가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간 흔적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스타일보다 ‘맥락’을 읽는 설계로 만족 극대화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은 설득과 조율의 연속
권오섭 건축사는 초기에 지역 건설사들과 함께 다수의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실적을 쌓았다. 특히 고성동 서한 아파트는 실거주자들에게 평면 구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높은 선호도를 이끌어냈다.
최근에는 서울 소재 건설사들과 CMR, 민간참여형 사업 등 다양한 방식의 협업도 이어가고 있다. 공공 부문 설계공모에서는 구미시청 별관, 칠곡도서관, 청년 임대주택 등 다수의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 청송에 이색 숙박시설이나 청년 임대주택도 했었고 교육청에 칠곡도서관 등도 있다.
“공공 프로젝트는 설계비가 높은 만큼 준비 과정도 많고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안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다는 보람도 크죠.”
이을건축은 특정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는다. 권오섭 대표건축사는 ‘복잡한 외관보다는 단순하고 정직한 건축’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건물의 성격과 맥락에 맞춘 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설계는 내 스타일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사업 성격, 예산, 대상지 특성,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죠. 저희는 그 흐름을 읽고, 가장 적절한 답을 제안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 대해 묻자 그는 ‘설득과 조율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사업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 특히 민간 클라이언트의 경우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 쉽다.
“저희들은 클라언트가 요구하는 사항이 많으면 그것들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닌 경우에는 클라이언트와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설득해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별한 목표보다 지금처럼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파
권 건축사는 대구의 현재 건축 시장에 대해 “사실상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말한다. 개인들이 하는 일들은 전해보다 한 50% 이상 70% 줄었고 특히 분양시장 침체로 민간 프로젝트가 급감했다. 공공 발주 역시 다른 대도시에 비해 적은 편이다.
“대구에만 설계사무소가 900곳이 넘습니다. 시장은 줄어드는데 사무소는 많으니, 다들 힘든 거죠. 설계비 단가도 수십 년째 제자리라, 현실적인 개혁이 절실합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첫 아파트 프로젝트에서 심의 통과를 위해 일주일간 시청에 머무르며 공무원들과 줄다리기를 했던 일을 떠올린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심의가 서면 심의로 바뀌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 속에서도 결과를 만들어낸 성취의 기억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단순하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며, 계속해서 좋은 건축을 쌓아가고 싶은 것이다.
“다들 열심히 해주고 있어서 감사하죠. 특별한 목표보다 지금처럼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어요.”
대구라는 지역성과 설계라는 전문성을 함께 짊어진 이을건축. 권 건축사는 누구보다 지역에 대해 잘 알고, 또 누구보다 겸손하게 설계라는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권 건축사는 ‘소장’이라는 호칭 대신, ‘건축사’ 또는 ‘대표’라는 호칭을 고수한다. 설계사무소뿐만 아니라 부동산, 현장 등 다양한 업역에서 통용되는 ‘소장’이라는 단어가 건축사의 전문성과 역할을 희석시킨다는 이유에서다.
“변호사를 소장이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건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정체성을 제대로 지켜야, 대우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사의 가치가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처럼 더 많은 이들이 설계의 진짜 가치를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