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의 퍼스널 컬러인 ‘서경’과 서법을 이 시대에 재현, 동서양 공존도 가능한 편액을 쓰다
“묵서의 미학을 다각도로 고증한 추사필법론으로 소전예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작명하고, 송연묵과 마한지의 웅장한 성질로 외부공간에 걸맞는 필세를 그려낸 고전 서법연구의 정수”
지난해 열린 항백 박덕준 작가의 7회 개인전은 작품과 함께 묵서집 <귀(歸)>를 소개하였다. 전시에는 박 작가가 오래 연구한 추사필법론을 집대성하고 농묵의 전통서법으로 아트갤러리 예가에 붙은 새 건호인 <소전예가>를 쓴 원본 편액 4점까지 전시하여 서예인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다. 회화와 문법, 언어학과 어문학이 다르듯, 서예와 그 규칙을 논하는 서법을 함께 연구해 정통성 있는 필법과 추사체 분석에 일가견이 컸던 박 작가는 생소한 글자의 묵직한 기세를 표현하는 서예예술가이자, 서법의 예술성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전달하는 서법연구가이기도 하다. 소멸되거나 변형되어 묻혀 있던 추사서법의 본질을 발굴하는 한편, 관계론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을 전하는 박 작가의 작품 활동과, 그의 글자에 숨겨진 비범한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감상해 보자.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추사필법론을 정리하여 추사서법 해석의 새 장을 열다
서예가이자 서법연구가인 항백 박덕준 작가는 하석 선생을 사사하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에 경도되어 여러 편의 연구작품과 추사체를 재해석한 논문, 추사필법론 묵서집을 발간하며 탄탄한 서예서법 이론과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박 작가가 2019년 11월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된 “돌아가리라-귀(歸)‘를 주제로 연 <제 7회 박덕준 묵서전>에서는 2008년 출간한 작품집 <관도사획전> 이래 역작으로 꼽힐 묵서집 <귀(歸)>가 소개되었으며, 일반 도록과 다른 개념의 구성으로 화제가 되었다. 4파트로 구성된 저서에서는 이번에 전시할 <신작>과 추사간찰 하나를 주제로 한 <연구작품>, 여행 중에 지인들과 어울려 쓴 <객중서> 그리고 작가가 정리한 <추사필법론>이 저술되어 있다.
작가가 정리한 추사 필법론은 강하고 분명한 동작으로 처음 시작하는 제 1동작 기필, 한 호흡 쉬었다 송곳으로 모래를 찌르는 깊이를 유지하며 그어가는 형세의 제 2동작 행필, 흐트러짐 없이 먹과 지면에 밀착시키는 제 3동작 수필에 이를 때까지 형태보다는 동작과 힘을 유지하는 3가지 조건이 명쾌한 것이 추사체 필법의 큰 특징이라고 한다. 굳센 방필을 유지하는 예서에 근원을 두어 해서와 행서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박 작가는 추사서법을 재현할 최적의 소재인 한지와 송연묵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화선지에 유연묵을 쓸 때보다 묵직하고 선명한 이 지묵의 결합은 묵장 한상묵 선생의 송연묵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이밖에 충북 무형문화재 제 17호 황동훈 선생이 닥나무와 황촉규로 만든 단구전통한지, 보성삼베랑 이찬식 선생이 닥지가 아닌 삼지로 만든 마한지이며, 먹이 인쇄된 듯 선명하고 압도적인 필법과 발묵을 그대로 보여주며 추사 선생이 생존했던 시기의 필체의 그 느낌을 살리는데 가장 적합한 소재라고 한다.
서양식 건축 공간에 한국의 전통서예를 접목한 <소전예가> 공간예술 재창조
박 작가는 다양한 문헌자료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추사의 서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전시와 묵서집 발간은 그런 작업 과정을 한단계 마무리 짓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기존 서예와 달리 필법과 서법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박 작가의 서법 개념은 문자, 그리고 한문으로 표현을 짓는 문장, 마지막으로 필법과 묵법을 합친 필묵이라는 3가지 영역에 있다. 문자의 변천과 함께 2천 년 서법의 역사 속에서 서예에도 사조가 있다고 말한다. 서양미술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다르듯이 서법을 이해하기위하여 서법 사조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한다. 서예는 글·기록보다는 예술의 정수라는 사조가 있기에, 박 작가는 글자의 기가 센 추사체에 매력을 느꼈으며, 형상만이 아닌 당시의 서법사조와 관계론적 화두를 보며 글씨가 예술이 되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묵법의 표현법체계를 설명한 첫 번째 서법서 <필묵법산고>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남다른 과정을 통하여 박 작가는 다른 관점에서 추사의 체계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글자가 차지하는 공간 전체를 한 눈에 보는 관계성을 파악하고 설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천년학>의 포스터병풍작업도 그런 관계성에서 탄생된 것이다. 그리고 서양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아트갤러리 예가>에 흰 벽돌로 된 외관이란 이름의 ‘소전예가(素磚藝家)’를 권유해 마한지에 송연묵으로 편액작품을 쓰고, 전각작가 박여 김진회 선생이 작업하여 현대식 건물에도 어우러짐이 뛰어난 편액 현판이 완성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건물 내 서예공부방인 묵서실에는 ‘소재(素齋)’, 두보의 시에서 차용한 이름을 지어 양각을 한 ‘이위려(爾爲廬)’, 호수에 여름 구름이 비치는 정자라 ‘하운정(夏雲亭)’이라 붙은 3개의 편액도 완성되어 전통한옥에나 있을 법한 편액이 현대식 건축물에서도 네이밍의 운치로 느껴진다는 격찬을 받았다.
추사 묵서집과 독도 묵서전, 이름/편액작업과 ‘글씨를 붓으로 쓰는 그림’은 즐거운 일..
평생의 꿈은 문자 연구 성과를 자료로 묶어 내는 일
박 작가는 추사 선생이 글씨만 보아도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서경’을 은유한 데서, 조선시대 명필이 서체로 보여준 ‘퍼스널 컬러’ 작법도 대단했다고 설명한다. 글씨의 본질을 터득하듯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 박 작가는 공간과 배치감을 이해한 건축물 편액의 경지를 보여준 것 외에도 지인의 이미지를 따 글귀로 쓴 이름전을 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씨를 붓으로 쓰는 그림”을 모토로, 2년 전 독도의 날 기념으로 연 <우산무릉 묵서전>에 이은 두 번째 독도전 겸 6회 개인전 <독도 묵서전>은 2017년 쓴 <해국망> 등 다양한 묵서를 소개한다.
이는 울릉도에서 자란 박 작가가 망망대해 위에 핀 해국(바다국화)에서 망(바람)의 속성을 느끼고 지어준 이름이지만, 해국의 꽃말 중 하나도 “바라다”였기에 박 작가의 작명 내공을 입증해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시에는 항백송에 붙인 논어 구절 <세한연후(歲寒然後)>, <안용복 깃발-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처럼 도일로 항거를 한 독도 수호자 안용복 선생의 기백이 느껴지는 묵서도 있었으며 박 작가는 향후에도 독도묵서를 지속할 뜻을 밝혔다. 한편 박 작가는 소전예가의 좋은 공간에서 추사체를 흠애하는 동호인들과 함께 공부하고 체험하며 묵서를 내는 삼근재의 확장판 같은 활동을 하고싶다고 전한다. 추사박물관과 추사고택등 자료와 작품을 감상할수 있는 공간은 많지만 그의 서법을 해설하고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이곳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한 박 작가에게는 서법활동에서 얻은 평생의 꿈이 하나 있다. 그동안의 문자연구 성과를 자료로 집필하는 일이다. 고대문자는 한나라 전후 혁신을 거듭하였고 그 과정은 문자를 간략화 생략화 하는 일이다. 혁신은 한나라 말기에 1차 정리되었으며 초서와 예서는 그 결과 나타난 서체로 현대문자의 원조에 해당한다. 즉, 고대문자에서 현대문자로 변화의 주된 논리는 ‘생략’이며 이는 혁신적 원리를 가진다. 그 생략의 원리를 정리한 내용이다. 초서가 되는 원리 또한 이 범주 안에 있다. 내용을 정리한 후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일개 서예가가 감당하기 방대한 작업이지만 일부라도 집필하는 일이 앞으로 과제라고 전했다. 더불어 서예예술을 매년 전시회로 소개해 관개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이이지만 이 자료를 완성하는 일은 평생의 꿈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