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일의 최고액권·모자화폐영정 생존 작가, 한국미술의 철학적 자생성 확립한 위대한 족적

“민주화운동으로 건국포장 국가유공자이자, 세계 70인의 작가로 은관문화훈장 수훈한 예술가”

2020-01-10     정재헌 기자
일랑(一浪)

24세에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으며, 프랑스 문부성 초청 루브르박물관의 첫 생존 작가이자 3회 연장전 기록을 지닌 일랑 이종상 화백은 최초이자 유일한 미술사적 업적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서울대 미대 출신 미대교수로서 유일한 최초의 대학미술관 건립자이자, 서울대학교박물관장·초대박물관장을 역임한 그는 원로화백들 속에서 37세 최연소 화폐영정작가로서 5천 원 권의 율곡 이이 선생을, 35년 후 모친 신사임당을 최고액권 5만 원 권에 담으며 세계 최초의 모자화폐영정작가가 된 것이다. 
그런 일랑 화백의 경력 중에는 인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현역화가 1호로, 우리 민족미술의 자생성을 통한 근원형상인 원형상(源形象)을 탐구한 업적도 있다. 이를 통해 일랑 선생은 우리만의 정통 화풍과 건축조형의 조화, 벽화의 재료기법과 한민족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문화적 활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 들어 고구려벽화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최초로 ‘문화영토론’을 주창하고,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으로 미래의 동북공정에 대비했던 것이다. 1970년대에 시작한 ‘독도문화심기운동’은 2019년 아랍에미리트 대한민국예술원전 개막식장에서 독도의 일출을 지두화(指頭畵)로 그린 퍼포먼스로 더욱 알려져 수많은 외빈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일랑 선생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적 문화자생성을 유목, 수렵, 농경과 해양의 다문화성에서 찾았으며, 창작활동으로 남북문화 동질성회복에 앞장서 평화통일의 마중물이 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 탐구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서훈·건국포장전수의 국가유공자가 된 일랑 선생은, 미술이라는 전공 안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주어진 소임을 실천하여 후학들로부터 존경받는 원로화가이다.

한국미술의 정통기법과 조형철학 계승, 표준영정의 오류를 수정해 민족화의 긍지를 살리다

한국 화단의 상징적인 이름, 일랑 이종상 선생은 5백여 회의 초대전과 단체전, 해외전시와 30여 회의 개인전에서 고구려 벽화의 현대화와 독도진경화로 국토를 수호해 온 현대미술의 존경받는 원로 거장이다. 일랑 선생은 1998년 프랑스 문부성 TFAA 초청으로 생존 작가 최초로 루브르미술관 까루젤에서 병인양요의 진실을 알리는 설치벽화 <원형상-마리산>(6x72m)의 작품 개막식에서 외규장각 조선왕조실록과 직지요체 등 문화재 반환을 최초로 언급한 작가이다. 
또한 1988년 시행된 대한민국헌법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고 시작하듯, 1960년 4월 19일 당시 서울대 미술대 2학년 재학 중이던 일랑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한 바 있다. 민주화 투쟁을 알리며 고향의 노모에게 유서를 남기고 분연히 민주화의 데모행렬에 앞장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유탄을 맞고 수배된 후, 이승만의 하야 망명으로 학업에 복귀한 일랑 선생은 이후 국전 특선과 제 1회 신인예술상 최고특상, 국전특선 내각수반상과 대학 4학년 차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며 23세로 최연소 국전사상 추천작가에 등극하며 화단에 선을 보였다. 
이후 서울대에 출강하며 많은 논문을 발표한 일랑 선생은 천경자, 김기창, 박래현 등 원로화가들과 한국 최초의 화문집 <화실의 창을 열고>, <솔바람 먹내음>등을 발간하며 31세에는 최연소 국전초대작가로 선배·스승 격 화가들의 출품작을 심사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 가운데 미술협회나 예총과 같은 화단정치에는 뜻이 없었고, 수십 년 후 등장할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일본 제국주의가 잔재된 망언을 예측,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을 시작했으며 1977년 최초의 독도화가로서 ‘독도문화심기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화가 최초의 인문학박사로서, 일랑 선생은 서울대학교박물관장이 되어 대학미술관 최초로 <독도진경기획전>도 개최했다. 이처럼 미술의 범주 안에서 최선을 다해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업적으로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 일랑 선생은, 2003년 제180호 대한민국건국포장 전수로 헌법에 명시된 국가사회공헌 상훈법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자격을 갖춘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에서 유례없는 한국 최고액권 화폐의 신사임당, 율곡 이이 선생 모자영정을 그리고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생존 화폐영정작가이자 독도 애호가들의 자랑이기도 한 일랑 선생은 팔순을 넘긴 현재도 한국 문화예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보인다. 일랑 선생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생존한 산정 서세옥 선생 및 소천하신 월전 장우성 선생, 남정 박노수 선생의 직계 제자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50여 년 간 민족의 정통영정화기법인 육리문, 배채기법을 연구한 일랑 선생은 순종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 선생으로부터 유일하게 정통영정만을 사숙하며 화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 이당 선생의 와룡동 자택으로 찾아가, 세계유일의 정통 어진점묘법인 육리배채(肉理北彩)법을 전수받은 일랑 선생은 전통미술계법기승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 쐐기를 박는 활동을 보여 왔다. 표준영정제도 고증도 없어 이루지 못한 표준영정의 오류 수정을 바란 이당 선생 생존 당시의 당부를 기억한 일랑 선생은, 2009년 최고액권의 신사임당을 그리면서 학계 권위자들로 고증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새로운 화폐영정을 고증, 실현한 일랑 선생은 2019년 10월자로 수많은 표준영정에 대한 보도오류를 바로잡기 시작한다. 
일랑 선생은 그간 한국은행 소장본이자, 국가표준영정을 참고하여 해방 당시 7세로 친일미술행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랑 선생이 철저한 고증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행발권국장과 협의한 일랑 선생은 새로운 고증자료를 반영해, 1965년 고증 없이 제작되고 오죽헌에 안치된 본은 16세기 생존시기가 아닌 19세기 이후의 머리장식과 복식으로 표준영정화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랑 선생과 고증위원회는 지역의 대부호집안 신씨 가문의 딸로서 지식인이자 신여성으로 예술을 한 신사임당을, 5개월에 걸친 고증회의와 시연으로 노쇠한 외모 대신 창작열이 강했던 연령대의 두발형태와 화장법으로 복원했으며, 정면상을 칠분측면화로 바꾼 새로운 한국은행본 신작이 더 정확한 고증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파리 루브르미술관이 영구전시 제의한 ‘한지 배면조명법’ 화가, ‘문화의병단’ 자주성 세워

1961년 22세로 국전 동양화부 최고특상, 23세의 최연소 국전추천작가 선정 이래 일랑 선생은 1975년 미국 텍사스대 제 1회 초대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1997년 프랑스 문부성의 초청으로 5개월에 걸쳐 루브르박물관에 한국인 최초, 첫 3회 연장전을 기록한 한지 배면조명법에 따른 ‘병인양요’ 주제의 설치개인전으로 전 세계 127만 명의 관람기록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일랑 선생은 혜화성당과 절두산성전을 설계한 이희태 교수로부터, 1960년대 초 개학 중 건축학을 수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3:2 황금비율의 결이 담긴 유결한지의 창호문화가 방한방풍 외에도 광섬유성 채광을 활용한 예술·건축적 지혜가 집대성되었다는 점과 이 ‘내외소통’의 영상 창호문화를 통해 세계 유일의 장판문화를 지켜 온 한민족의 능력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 같은 장지문화가 있었기에 구텐베르크보다 73년이나 앞선 금속활자본 직지(直指心諦要節)가 1377년 고려 우왕 때 완성됐고, 한중일의 같은 동양화권에서도 ‘겹’의 미학인 장지에 스미고 번지는 한국만의 장지채색화기법이 있는 것이다. 
일랑 선생은 한국 최초의 신리순교미술관에 이 정통장지기법과 육리배채기법만으로 작품을 봉헌해 미술사적 가치를 더했다. 일찍이 ‘문화영토론’을 주장한 일랑 선생은 ‘현대 진경론’을 실천하며 근원형상에 따른 ‘원형상’이라는 우리 미술의 근원적 철학을 주장하며 5천 년간 이어온 한국문화의 자생적 근원을 파악하고자, 40여 년 간 만주의 집안(集安)과 북한의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작가로 모함 받아 남영분실에 불려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신념을 꺾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이후로도 1999년 아태평화위원장의 초청으로 3차례 북한고분유적답사의 꿈을 이룬 일랑 선생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하고자 ‘자생문화론’, ‘문화영토론’을 근거로 고구려고분군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등재를 막는 중국을 비판하는 <고구려 벽화 앞에 부끄럽다>라는 칼럼을 게재하고, 직지를 만든 우리의 장섬유 유결한지의 자존심을 걸고 전국 60인 ‘문화의병단’을 결성했다. 루브르미술관 전시당시 병인양요의 진실을 알린 작품의 영구소장 요청을 받자, 외규장각 조선의궤도서와 직지 반환을 조건으로 건 애국자 일랑 선생은 친분이 두터운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의 설계로 국내 최초의 대학미술관을 서울대에 건립하고, <한강유역의 고구려유묵전>, <독도진경전>, <발해전>, 칸 감독상수상자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의 시발점이 된 <오원 장승업전>을 기획, 개최하기도 했다. 

남북 첫 번째로 독도작품 공동전시 이루고 문학, 철학, 종교성화를 아우르는 예술행적 기록해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 일랑 선생은 국내 첫 독도진경여행을 통해 1977년 <이종상 진경전>을 개최하고, 30회가 넘는 독도입도로 그린 6백 여 점의 독도진경화와 ‘원형상-독도’ 추상화들을 제작했으며, 울릉도 독도박물관과 서울 동북아재단부설 독도체험관에 ‘최초의 독도화가’ 자료로 기증하여 일본 다케시마화를 그리려는 일본 작가들의 시도를 단념시킨 바 있다. 또한 동해와 독도수호에 앞장서는 외교관 출신의 라마에르메릴 대표 이함준 박사와 함께, 고문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2018년 고려대학박물관에서 한국 최초의 남북작가독도전을 열어 북한 만수대창작사 선우영 인민작가와 자덕도작품을 함께 전시해, 이 남북 독도공동전시를 통해 독도(DOKDO)의 고유명사를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논총> 33인 우수논문에 선정된 <재료기법으로 본 고구려벽화>, <쌍영총 벽화제작도>를 발표하고, 동국대 이기영 교수의 도움으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찬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원효대사가 우리식으로 해석한 철학을 연구하면서 인연이 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동서비교미학을, 박사과정에서 동양철학을 10년간 공부하여 현역화가 최초로 인문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도 주변을 놀라게 했다. 
문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일랑 선생은 (사)문학의집이 선정한 ‘가장 문학적인 화가상’을 수상하였으며, 희물결출판사의 베스트셀러 <한국의 예술혼 높이 날다>도 발간했으며 김남조 시인과 김형영 시인 등이 일랑 선생의 화가로서의 삶을 시를 통해 헌정하기도 했다. 또한 문학과 역사, 예술이 조화된 삶을 반영하듯 후소론(後素論)이라는 전인적 회화윤리학으로 ‘시서화 삼절’의 유불교, 선비문화의 조화를 설명한 일랑 선생은, 고려 불화를 연구해 서양의 쉐라 점묘법에 앞선 인물묘사기법인 육리문(肉理紋), 화폐영정에도 활용한 배채법(北彩法)과 같이 난도 높고 깊은 철학이 있는 전통화법의 자생성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그리고 본업인 화백으로서 고분벽화와 독도화, 현대진경화와 원형상작품 외 현행 화폐영정화가로 명성을 얻은 일랑 선생은 기타 영정과 성화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원효대사 영정과 고산 선생 영정은 일랑 선생의 작품이다. 
일랑 선생은 천주교에 귀의한 이후로 병인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충남 신리성지에 개관한 국내 첫 순교미술관에, 장지기법을 담은 순교성화봉헌으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메트로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 성 손자선 토마스 영정화 5점과 1천 호 크기의 순교기록화 13점을 봉헌하며 역사의 일부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처럼 일랑 선생이 다양한 족적의 스펙트럼을 통해 보여준 행보들은 이 시대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예술가의 자세이며, 철학,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귀감이 되는 거장으로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