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마저 뛰어넘어 캔버스 위에 닥종이처럼 스며든 한국 문양의 정서
시간의 흐름마저 뛰어넘어 캔버스 위에 닥종이처럼 스며든 한국 문양의 정서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9.08.20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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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장영희 작가
“전통에서 찾아낸 현대적 정체성, 산수화와 암각화에 각성하고 우리 생활과 산천에 매혹되다”
 
[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불혹(不惑)의 나이는 미혹되지 않고 한 길만을 바라볼 나이인데, 화가 장영희 작가는 41세의 나이로 첫 회원전에 출품한 이래 다양한 물감을 쥐고 우리 전통 풍경과 문양을 바라보며 실험정신의 외길을 걷고 있다. 한국화의 정체성이라는 흰 한지에 전통을 현대화한 채색을 시도한 장 작가가 보여준 새로운 회화는 선대의 얼과 정신, 문화적 가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의 색채와 작가정신으로 짜낸 조형언어가 나래를 펼치는 작품들이다. 동양의 수묵화와 담채화, 서양의 수채화와 유화를 받아들이고 분채와 혼합재료로 만든 장 작가의 작품들은, 전통과 현대, 고전과 파격을 아우르며 전체적인 톤으로 잘 융합되어 있다. 창조와 재해석의 정점을 보여주며 자신만의 독창성을 캔버스 위에 만들어 가는 장 작가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둘러싼 서양화의 ‘발산의 멋’, 신묘한 고전문양을 계승한 독창성으로
 
어느 저명한 평론가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며 “시공을 초월한 전설 앞에서는 손상이나 세월의 흐름마저도 예술을 완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일컬은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는 동서양의 물감과 소재로 파격에 가까운 융합을 시도한 결과, 화려하고도 빈티지적인 질감을 만들어 귀중한 고분 벽화와 클래식한 석판화 같은 날것의 미학을 보여주는 독특한 채색법으로 주목받아 온 화가가 있다. 화가 장영희 작가의 작품에서는 마치 세월의 풍상에 사라진 과거 작품의 전성기를 정교하게 복원한 듯 반갑게 다가오는 친숙함이 있다. 장 작가는 동양의 신비로운 문양들을 선명한 오방색으로 재현하는 대신, 과거의 시점이 현재와 공존하는 투박함 속에서 재해석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서양인들에게는 동굴벽화처럼, 삼국시대의 후예인 우리 민족에게는 전통 문양과 문화재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봉황의 날갯짓 선 하나조차 정교하게 담은 2005년 작 <봉황>에 보이듯, 장 작가는 한국화가 남강 김원 선생을 사사하며 진경산수의 절경을 섬세히 묘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화는 선비정신으로 상징되는 아담한 여백의 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이데아를 마음속에 그리며 대작을 가득 채우고 병풍을 만드는 파노라마적인 의외성이 있는 장르이다. 후자에 속하는 장 작가의 작품관점을 꿰뚫어 본 서양화가 최돈정 선생으로부터 서양화를 권유받은 장 작가는, 한때 화선지 전면을 압도하듯 채워 온 자신의 기질을 서양화로 마음껏 발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국 명산지와 절경을 흑백으로 재현하는 수묵에서 담채로 이어지고, 서양의 기법을 동원한 장 작가의 예술적 발산은 1990년 제 1회 국제 종합예술대전 특선, 2000년 27회 수묵화 경북미술대전 최우수상 수상, 정수미술대전과 경북미술대전 및 PARIS-Echange Coree Athena 입상을 비롯해 한국미술대상 6회 은상, 7회 금상을 수상하며 충분히 동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용총 수렵도의 경쾌함과 장니 천마도의 단아한 기백을 현대의 물감으로 재현
본격적인 작가전으로 1986년 제 1회 수묵회회원전에 참여한 후, 1998년 제 1회 개인전을 갖고 훈민정음 반포 550돌 기념 일본 한국문화원 초대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류전, 전국여류작가 100인전 등 수많은 초청전과 협회전, 교류전에서 경험을 쌓은 장 작가는 점차 서양화 소재를 차용하기 시작해 이제는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화로 독창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장 작가에게 깊은 영감을 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그리고 신라 장니 천마도의 신성한 동물들이 그려진 암각벽화, 음각의 선과 문양이 화려한 토기와 양각이 섬세한 칼, 그리고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는 우리유산의 조각들이 지닌 기백들은 장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다시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얼>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와 기마인물형 토기로부터 얻은 전통문양과, 비천상과 봉황을 비롯해 인간과 소, 천마(기린), 사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12지신과 신령한 네발동물들을 담백한 화풍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장 작가의 작품들은 1990년대 정통수묵 명승지, 2003년 이후 시도된 화선지 위의 혼합재료로 나타낸 전통문양들, 그리고 이후 인간의 삶에 한결 다가와 토속적인 향기를 느끼게 하는 소재들로 나뉜다. 특히 2000년대 중반기를 전후한 시기는 휘호를 그리듯 절도 있는 새(乙)의 자유로운 궤적으로 독보적 판타지를 보여주는 <향수>, 원과 패턴, 자연과 어우러지는 동물들의 배열과 군상을 잔잔히 표현한 연작 <흔적>과 같이 화선지 혼합재료로부터 캔버스로 진화하는 터널 역할을 한다.
나이프 스크레이퍼로 벽지 질감 내, 선대 암벽화처럼 오늘날 인간의 일상 다듬고 기록하다
서양화로 온 후로도 임파스토의 양감보다는 덜 묵직한 담채, 그리고 액션 페인팅 중 뿌리는 기법과 유화물감의 나이프 스크레이퍼 기법으로 엠보싱 벽지 같은 생활감 있는 질감을 추구하는 장 작가는, 2006년 회갑을 기념한 ‘장영희 작품전’ 이후로 더욱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또 추상과 재해석 속에서 10호에서 100호에 달하는 캔버스를 채우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여전하여, 신비로운 문양 외에도 인간 군상들의 북적이는 일상을 따뜻하고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작품들이 많다. 2013년 작 <장날>에서도 누비를 오려 붙인 듯 선면의 외곽 안에 이 기법을 표현해 파스텔톤 색감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시도는 물결치는 구름과 뛰노는 사슴, 굽이굽이 이어진 산지와 날선 곡선의 풀과는 다른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 차, 마치 캔버스가 우리의 닥종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또한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 빠지는 대신 우리 문화유산을 존경하면서 현실에서 숨쉬기를 택하고, “과거를 신화로 경배하기보다는 이를 우리 주변의 현실로 끌어내어 다듬고 싶다”는 장 작가는 탈춤 인물화 <환희>를 비롯해 청도 소싸움과 장승, 농번기의 논밭,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의 정경을 담고자 자주 카메라를 들고 국내를 여행한다. 시간이 지나 소재는 달라졌지만, 좋은 스승들로부터 화폭을 채우는 법을 배우던 시절부터 장 작가가 그림에 접근하는 방식과 열정은 늘 똑같다. 그것은 한국화 시절이나 퓨전에 가까운 서양화인 지금도 오래 공들이고 바탕작업을 거쳐,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 대상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평범한 풍경화에서 삼국시대의 독특한 문양, 추상적인 비구상에서도 ‘장영희’라는 작가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만드는 강렬한 이끌림의 원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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