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인식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 임세정 기자
  • 승인 2019.07.16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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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영 설치조각가

[월간인터뷰] 임세정 기자 =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의 세계에서 인간은 세계와의 수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만의 이점에 따라, 혹은 관심과 정념,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립된 ‘세상’에 대한 인식은 곧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일종의 의식이나 정신으로 발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은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주장해왔듯 인간 내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의 세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욕망에 침식된 현대인들의 군상을 나타낸 작품세계 주목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자아조차 망각한 채 욕망을 좇아 맹목적인 전진만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군상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구체화시켜 표현해 온 설치조각가, 주라영. 그는 지난 작품 ‘달려가는 사람들’ 시리즈를 통해 ‘자본’과 ‘욕망’에 쉽사리 추동된 현대인들의 군상을 바싹 마르고 뒤틀린 인간의 형태를 한 다수의 조각상들이, 혹은 외양적으로는 다채로운 색상과 꽃, 이미지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었지만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표정을 지닌 인간들이 명확히 실체화되지 않은 한 지점을 향해 내달리는 것으로 표현해왔다. 
몰개성과 익명성을 뒤집어 쓴 채 맹목적인 질주만을 거듭하던 현대인들은 종래에는 처음의 목표조차 잊은 채로,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주라영 작가는 이러한 설치조각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가, 인간의 순수한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앞에선 관객들, ‘나’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주라영 작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해체’라는 전시방법을 통해 관객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관객들이 작품을 한 점씩 구입하고 가져감으로써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던 군상이 조금씩 해체되어 가는 것, 끝내는 텅 비어있는 빈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작품의 완성을 꾀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시 진행방법은 많은 이들에게 진한 울림을 전하며 회자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지난 2017년 맨해튼의 K&P갤러리에서 첫 뉴욕 개인전을 갖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인도, 서울, 광주 등에서 12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초대전, 특별전 등에 참여한 바 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내가 보는 것은 실재인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시리즈에서 작품을 통해 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인식’과 그 눈 너머에 있는 인간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주 작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각자의 삶의 인식 시스템에 의해 저장된 정보의 투영입니다. 나의 인식 변화에 따라 대상은 달라지고, 세상은 내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바뀝니다”라며, “경험의 정보로 투영된 홀리스틱(Holistic)한 결합체인 대상에 우리는 이름과 개념, 의미,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삶으로 추동하는 욕망에 의해 각자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진정한 소통을 배제한 채 각자가 만들어낸 인식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인식의 변화에 대한 주라영 작가의 통찰은 그가 인도를 여행하며 직접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는 “인도를 다녀온 한국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더럽고, 빈대도 많고, 사기꾼 천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력 있다, 다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전자에서 후자쪽으로 서서히 바뀐 유형이라 할 수 있겠네요”라고 말했다. 한 번은 인도여행 중 촉박한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택시기사를 재촉하고, 기차역에 도착해서도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느긋하게 자리를 깔고 누워있거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와중에도 자신은 기차가 언제 도착할지 몰라 화장실도 편히 가지 못한 채로 무려 12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만으로 가득찬 채 헛되이 잃어버린 12시간. 기차역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놓치지 않았을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된 이 일화가 그를 변화시킨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의 매력에 빠진 주 작가는 인도 비스바바라티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행했으며, 이후 한국과 인도, 티베트, 네팔 등을 오가며 작품세계를 정립해갔다.

이번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시리즈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 인간의 표정에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함께, 본질에서 멀어진 현란한 현상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자신이 수용한 지식으로 규정된 ‘인식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하는 현대인들이 결국은 인간의 존재가 전하는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듯하다. 주 작가는 이러한 인간들에게서 매순간 찰나지간으로 사라져가는 삶을 흘러내리는 텍스쳐로 표현했다. 또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세상을 응시하는 시선으로 포착함으로써 다시 한 번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인식의 감옥 안에 갇혀 좁은 창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정작 실재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주 작가는 “자본의 시대에 길들여진, 욕망의 최면에 걸린 현대인들은 마치 포로처럼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 습관처럼 끌려다니는 이곳은 감옥이나 다름없습니다. 물질은 풍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 뒤에서 우리는 삶에 대한 갈망과 갈증, 그리고 공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들은 주라영 작가의 초기작들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1999-2000년의 「순간 (Moment)」 연작으로 인간의 표정과 시선을 통해 엿보이는 존재론적 질문을 담아냈던 것에서, 욕망을 맹목적으로 좇는 군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화했던 그의 작품세계가 다시금 ‘내면’에 대한 물음으로 그 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희망을 찾고 있는 주라영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이어질지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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