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화교 130년, 국민이자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다
인천화교 130년, 국민이자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다
  • 임승민 기자
  • 승인 2019.05.20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화교협회 손덕준 회장

[월간인터뷰] 임승민 기자 = 130여 년 전 인천 화교들 대부분은 중국 산둥에서 조국의 전쟁과 인재를 피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화교들은 인천에서 돈을 벌어 가족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인천에서 장사와 무역, 농사에 종사하며 기반을 쌓은 화교들은 인천에 정착하여 현재 인천은 화교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화교는 한국 다문화사회의 시초 
인천화교협회 20대 회장 손덕준 회장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결혼해 정착했다. 이른바 ‘구(舊)화교’라고 분류되는 화교 3세다. 손 회장은 “화교는 한국 다문화사회의 시초이고 그런 측면에서 포용하고 보존해야 될 가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한국 양쪽에서 모두 외국인 취급을 받을 때는 서럽다. 인천 화교인들이 대만 국적을 가진 외국인인 것은 맞지만, 납세의 의무와 투표 권리를 가진 엄연한 인천시민”이라며 “우리의 고향은 인천이지,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도, 앞으로도 대한민국 국민, 인천광역시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손 회장이 대변하는 인천 화교인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손 회장은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자금성, 태화원 등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손 회장은 그의 자녀, 손주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다. 아들은 4대째 가업을 이어 받아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손 회장의 부인, 사위, 며느리는 모두 한국인이다. 
그는 2016년 8월, 임기 3년의 인천화교협회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헌신해오고 있다. 이미 상가번영연합회 회장을 오래 맡아온 그였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한다. 손 회장은 “인천화교는 한국화교의 모태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명맥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 시민문화공간으로 재탄생
인천화교협회는 1887년 ‘중화회관’에서 시작한 화교자치조직이다. ‘중화상무총회’, ‘중화화상상회’, ‘중화상회’, ‘화교자치회’ 등을 수많은 이름을 거쳐 1960년 현재의 화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화교 상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자치’ 역할을 주로 맡았지만, 지금은 출생·사망신고를 비롯한 각종 민원을 처리하는 ‘주민센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손 회장은 “자꾸 화교들이 위축되고 없어졌다고 하는데 거의 귀화했다”면서 “이제 국적과 수치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1998년 7월에 IMF 사태 당시 외국인 부동산취득법이 완화되면서 많이 편해졌다. 영주권도 없어 거주권을 3년마다 연장했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손 회장은 “이제는 귀화를 신청하려면 예약하고 줄을 서서 1~2년 정도면 가능하다. 그만큼 대한민국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화교들의 귀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고 덧붙였다.
인천화교협회는 3800여명 회원이 매달 1000원의 회비를 걷어 운영되고 있다. 손 회장은 “아직도 인천 화교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서 “인천 화교 역사를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 그는 “인천 화교는 성실히 시민의 의무를 다하면서 대를 이어 정착해 살고 있다. 화교들도 노인, 장애인 복지가 절실하다”고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호소했다.
작년에는 한국 화교 136년 역사를 상징하는 인천차이나타운 회의청(會議廳·옛 청국영사관 부속 건물)이 시민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40년 넘게 방치된 채 굳게 닫혔던 회의청이 문을 열면서, 인천차이나타운의 명성을 회복할 마중물로 떠오를지 관심이 쏠린다. 이에 손 회장은 "130년이 넘는 인천 화교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 지역사회와의 소통도 넓히고자 한다"며 "한국은 물론 해외 관광객이 인천차이나타운에서 꼭 찾는 명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