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 빛 주름진 천의 어두운 장막을 열어 밝고 따뜻한 톤으로 칠해진 삶 속으로
청록 빛 주름진 천의 어두운 장막을 열어 밝고 따뜻한 톤으로 칠해진 삶 속으로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9.04.17 1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무함과 상처로부터 샘솟듯 흘러나온 희망의 메시지, 다양한 소재 표현으로 더 도약할 것”
서양화가 김예리/ 문아트스튜디오 원장
서양화가 김예리/ 문아트스튜디오 원장

[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서양 복식의 상징인 천주름은 성물(聖物)로 간주될 만큼 위대한 종교적 예술품들에 차용되어 수많은 경건함을 상징해 온 바 있다. 2003년 예원중학교 재학 때부터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63개국이 참여한 체코 국제예술박람회의 최우수상인 리디체 장미메달을 수상하고, 6년 후에는 뉴욕 스콜라틱스 국제미술대회에서 3개의 골드키를 수상할 만큼 촉망받는 화가 김예리는 바로 이 천주름의 종교적 함의, 색과 심미적인 표현주의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젊은 예술가이다. 떠나간 인연을 그리워한 청록색 죽음의 세계로부터 치유와 희망의 환한 세상으로 각성하기까지, 김 작가는 압도적인 재능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생의 관점과 세계관의 변화를 표현하며 예술가로 성장해 온 과정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독자들 앞에 꺼내 보였다.

청록 빛깔 주름 속에 숨겨진 메시지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이화여대 재학 시절, 9개 대학 중 20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대표전에 스카우트되고, 그 중에서 특별히 선정되어 이마주 갤러리 개인초대전 ‘Beyond the White Boundary’ 에 작품들을 소개한 서양화가 김예리는 수채와 과슈만으로 정교한 사실주의적 천주름 기법을 보이며 청동처럼 차갑고 푸른 색채묘사를 연 예술가이다. 비탄에 찬 성모와 예수의 거룩한 희생을 기록한 예술작품들의 필수요소였던 천주름(드레이퍼리)을 <청월(靑月)>의 주 소재로 삼아, 소용돌이와 창조의 근원, 코마와 코어를 연상케 하는 푸른 달의 파격과 새로운 이미지로 해석해 낸 김 작가는 미술을 함께 해 온 ‘지음(知音)’인 친구를 잃은 애통함에 붓을 놓고 1년 간 병석에 누워 칩거한 적이 있다. 

예술적 멘토였던 어머니가 산행을 권하면서 불면증을 해소하고 안정을 찾은 김 작가는 그 때부터 짙은 청록색, 내부를 가리고 전부를 덮어 은유하는 천의 주름요소가 지닌 심미적 속성에서 예술가의 본능을 되살렸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꼽는 2014년 작 <Eternal Pledge(영원한 맹세)>는 한없이 깊은 사색의 한 자락을 따라 반지로 상징되는 우정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서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이라는 깨달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Near by>, <生>처럼 누군가에게 이 테마는 천주름 이미지의 연장선이자 고독과 고통의 이미지였겠지만, 죽음 같은 고통에서 빠져나온 김 작가에게는 청록과 천주름이 오히려 아름다우며 안정감을 주는 요소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전시회에서 적지 않은 관객들은 천주름에 숨겨진 미학과 허무의 근원에 공감했다. 이들의 눈에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중세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처럼 생사가 공존하는 지점에서, 어둠에서 빛의 세계를 향한 속성에 이끌려 내면에 묻은 슬픔을 토해 내며 현실로 돌아오는 경험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작가 또한 자신이 만든 메시지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언제부터인가 처절하고도 차가운 청록이 손끝으로부터 빠져나가며, 대신 햇살처럼 깃든 생의 기적을 바라보게 된다.

흙과 나무에서 새로운 영감 얻어 조각과의 콜라보, 삶의 변화와 생의 희망 담을 것

재능 있는 예술가의 삶은 그의 작품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에도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낸다. 개인적인 비통함을 겪은 대가로 죽음을 금기보다 새로운 세계가 숨겨진 개념으로 해석하며 더 높이 도약한 김 작가는 어둠의 수렁으로부터 걸어 나오면서, 회화와 조소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재능을 통해 작가의 감정과 의도를 전달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그래서 모세가 땅을 밟을 때 나타난 꺼지지 않는 불꽃, 가시떨기나무의 일화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고, 과거의 아픔과 작별하면서 드레이프된 천이 물 위의 여러 기둥 위에서 펄럭이며 물에 투영되고 하늘에 반사되는 효과를 보인 영상 <Farewell>을 제작하기도 했다. <Deja Vu>는 지난 해 2월 오픈한 화실, 문아트스튜디오와의 인연이 담긴 그림이다. 건물의 프레임과 창문, 향나무의 구도가 좋아 그림을 그린 지 3년 후 화실을 열고자 부동산을 찾았을 때, 이곳을 매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문아트스튜디오는 내면과 과거의 일화를 마주하고 그림으로 다독이는 창작자들의 사랑방이다. 김 작가는 현재 판교 인근의 전문직군인 20-60대 30여 명의 성인 수강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오는 5월 20일부터 6일간 성남시청에서 대관하는 ‘치유전’ 에 수강생 20여 명과 참여할 예정이다. 김작가는 전시회 대관일정을 따낸 수강생들의 자기표현 의지가 상당하다고 설명한다. 

김 작가는 기존 작품에서 청록빛을 지운 후에도 천주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음과 동시에 천주름이 일종의 답습과 정형화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현재는 기존의 극명한 명암대비 표현으로부터 벗어나 따뜻한 색감과 풍경의 요소들을 반영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명예를 얻었지만 내면에는 상처를 갖고있는 수강생들과 그림으로 진지하게 소통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게 된 김작가는 나무가 있는 여러 풍경의 잔상들을 천주름과 병합시키는 작품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한다.  화실에서 그림 외에도 재능을 보여 온 부조, 조각을 결합하는 시도나 우드버닝, 우드용접에 관한 수업도 할 만큼 지금의 김 작가에게는 수 년 전 작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밝은 빛과 나무, 흙의 색과 질감을 향한 에너지가 넘친다. 풍경과 초상, 비구상이 다수를 이룬 한국이기에 그 독창성으로 장래가 더욱 기대되는 김 작가는, 내년 4월 경 면사포를 쓰게 될 예정이며 이후 회화와 조각을 결합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