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불확실성이라는 큰 주제로 켜켜이 퇴적된 아이디어를 발굴한 순간
인생의 불확실성이라는 큰 주제로 켜켜이 퇴적된 아이디어를 발굴한 순간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8.12.10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실의 사물들을 이용해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작가 자신의 삶과 목소리에 담았다”
조각가 정찬우 작가
조각가 정찬우 작가

[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모든 인생은 고통이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고통의 악순환으로 빠뜨린다는 쇼펜하우어의 시니컬한 인생론은 생존에 대한 욕망보다는 생존을 욕망하지 않는 의지야말로 인생을 구원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예측할 수 없는 불행, 성공여부의 불확실성, 그럼에도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불안과 절망으로 지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경지란 무엇인가. 제왕과 술꾼도 결국 한 줄기 햇빛을 공유하는 인간일 뿐이라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함, 스스로에게 ‘원산폭격’을 가하면서 사회비판에 절망 아닌 비평 한 토막을 더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조각가 정찬우 작가다. 정 작가는 창작에 정진하여 언젠가는 은사와 같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꿈과, 3포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젊음의 의지를 용접해 꿋꿋이 쌓아 올리는 중이다.

소주병이 굴러다니는 이승에 사는 초현실주의자, 물질만능주의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보다

‘인간의 왕국’은 과연 문명 세계인가?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공수래공수거, 무소유의 미덕을 대중들에게 설파한 뒤 리무진 의전을 받는 명사가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하루 16시간을 피땀 흘려 일해도 돌아갈 곳이란 보증금 없는 월세 15만 원 쪽방밖에 없는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 배금주의의 기준은 전자를 승자, 후자를 패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전 세계에서 작품가치를 인정받는 피카소에게도 무명 시절 다음 끼니를 살 돈조차 없던 혹독한 겨울, 습작들을 불쏘시개로 쓰며 “이렇게 귀한 그림을 땔감으로 쓰는 나는 세상 제일가는 부자”라고 으스대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인생의 불확실성과 모순에 대해, 유년기에 가세가 기울었을 때도 꿋꿋이 조각의 꿈을 키워왔던 한 젊은이는 쇼펜하우어의 삶의 의지철학에 기대 먹고, 마시고, 사용했던 물건에 빙의해 삶의 모습을 초현실적으로 박제하기 시작한다.

조각가 정찬우 작가는 개인적인 군상이 사회에 갖는 불만에 대해, 세련된 감각의 현실 판타지로 재해석해 낸다. 2014년 쇠와 소주병, 밥솥과 부품으로 표현한 <무제> 연작들은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굴러다니는 소주병이 영락없는 작가 자신의 모습처럼 보이는 공허감을 그렸다. 정 작가의 작품에는 한 인간의 방대한 세계관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아픔과, 그럼에도 자신의 공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일련의 과정과 함께 기성세대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는 겸연쩍음이 공존한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트롤산의 마왕을 만난 <페르 귄트>의 주인공처럼 불확실한 위협으로 가득한 삶을 지탱하는, 동물의 왕국을 능가하는 이 구슬픈 인간의 왕국을 향한 솔베이지의 간절한 소망의 주문과 삶의 축복으로 퇴적되어 있다. 개인의 아픔을 바탕으로 퇴적된 이 토탄(土炭)들은 화석처럼 고고학적 가치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모티브를 얻어 법안의 발의조차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의사당을 향한 분노에 불을 붙일 혈기왕성함 정도는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회한을 온 몸으로 받아주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 소파 같은 물건들은 <물질만능주의 악마의 탄생과 왕들!!>에서처럼, 비록 만취한 쓰레받기 옥좌일지언정 환상 속에서는 ‘왕좌의 게임’의 에다드가 가졌던 옥좌만큼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다.

망치와 용접기로 비즈니스맨들이 퇴근하는 애환의 시간을 땀 흘려 조각하는 예술가를 추구

NHK방송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을 보고 느낀 핵폭탄의 무서움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이들 지명의 약자에 K(한국)를 조합해 강렬한 졸업 작품인 <NHK핵폭탄>을 만든 정 작가는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며 前 한예종 전수천 교수와 협업으로 서울시청이 의뢰한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 작가는 대작을 추구하기보다는 창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삶에서 모티브를 얻는다고 한다.

갤러리 안의 우아한 예술가보다는 망치와 용접기로 돌을 쪼고 금속을 이어붙이는 억세고 땀에 젖은 조각가를 추구하는 정 작가는 이 시대의 평범한 직장인들, 퇴근 시간과 출근 시간마다 소주 냄새를 풍기는 이 땅의 평범한 인간들을 위해 소주병에 특별한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작품을 만든다. 2017년 성남조각협회 제 55회 ‘조각의 미소’전에 출품한 <대가리 박아>라는 작품은 성냥개비를 사람의 모양으로 이어 붙여 기합을 받는 형상이다.

그는 37세의 나이로 3포 세대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쯤 되면 대가리라도 박아야 할 상황이 아닌가..”라는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뇌 속에서 성냥개비를 인간의 형상으로 이어 붙였다. 그러는 한편 아카데믹한 예술교육을 체계적으로 이수한 작가답게 금나래중앙공원 ‘숨고래 파빌리온’의 완공기념전에 참가한, 발해가 무너졌을 때 발굴된 용머리 조형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대리석 작품 <용머리>처럼 정석대로 용접을 응용한 조형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정 작가가 현실 타협이나 초현실주의적 환각에 빠지지 않고, 환상을 현실로 바꾸는 작업에 그토록 골몰했던 이유는 언젠가 예술가들의 이상향 중 하나인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첫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을 이룬 저명한 설치미술 작가이자, 지난 9월 작고한 은사 전수천 교수으로부터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정신으로 표현하는 방법론을 배운 정 작가는 계산적인 예술가보다는 삶 자체를 사랑하고 작품에 목숨도 걸 수 있는 삶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정 작가는 성냥개비 외에도 페트병 등 여러 소재를 이용해 다양한 크기로 제작한 <대가리 박아> 시리즈 5점을 오는 12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인사동 갤러리H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3년 간 공장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틈틈이 만든 작품들에는 술 냄새 가득한 직장인의 애환도 들어 있으며, 같은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마음에 와 닿고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메시지로 가득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