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이 이미지를 만나 사유한 흔적, 자연이 준 섬세한 운율의 텍스처
청음이 이미지를 만나 사유한 흔적, 자연이 준 섬세한 운율의 텍스처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1.17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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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거대해진 빛과 색의 흐름을 타고 시적으로 율동하는 ‘자연의 소리’”
서양화가 석점덕 화백/마산대 명예교수/청강미술관 관장
서양화가 석점덕 화백/마산대 명예교수/청강미술관 관장

‘소리의 시각화’에 일가견이 있어 전설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로부터 생애 유일무이한 평전 출간을 허락받은 영상감독 브뤼노 몽생종에 따르면, 좋은 음악은 일류 스튜디오 레코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어우러지는 풀벌레 소리가 들어간 라이브 음원에도 있다고 한다. 다채롭게 자연 속에서 현상하는 빛과 색, 그리고 소리가 결합된 종합예술에서 찾은 운율 덕분에, 우리는 종종 예측 불허의 라이브음원 명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소리의 흔적들은 수많은 사유를 거쳐 많은 예술의 모티브를 주며 감상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미술로 한 발짝 들어와 소리를 색으로 환원하고, 리듬과 율동을 빛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형태가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서양화가 석점덕 화백은 한층 규모가 커진 그의 연작, 자연의 소리 시리즈를 통해 소리회화의 형태와 질감의 개념을 명확히 보여준다. 

<IMAGE OF NATURE SOUND>, 자연의 소리가 지닌 시각적 흐름
“세계 최초로 자연의 소리를 시각화한 화가”, 하지만 이 문장 하나로 서양화가 석점덕 화백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규칙적인 듯 연속성이 없는 패턴, 무중력을 공명하듯 비가시적 영역을 떠다니는 소리의 가닥들, ‘자연의 소리’라는 메인테마 속에서 빛과 색으로 기록한 소리의 움직임을 덧입히고 긁어내 형상화한 그의 연작들은 역동적이고 자유롭다. 2022년 11월 24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 용산갤러리U.H.M에서 개최된 초대전 <IMAGE OF NATURE SOUND>는 신들린 듯 박차를 가한 석 화백의 작품 25점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가 찾아낸 자연의 소리, 이 명징한 흔적들은 LP를 긁는 핀처럼, 직접 만든 피그먼트 수제물감으로 덧입혀지고 긁혀지기를 반복하며 물감이 굳기도 전 신속하게 소리의 형태를 기록한 과정들이다. 석 화백은 가장 먼저 작업실에서 정성스레 기록한 소리의 파장과 규모를 언급한다. “지난 4개월 간 평소보다 작업속도가 빨라져 매우 즐겁게 보냈다. 50호 이상의 대작들만 했고, 요즘 그리는 사이즈는 비슷한 모티브 3-4개를 모으면 200호가 넘는 3m규모의 대작이 될 정도라, 해를 넘길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전시가 결정되고 4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작업량이 방대했지만, 마치 방언이 터지듯 소리의 샘으로부터 발굴된, 자연에서 온 유무형의 시적운율을 석 화백은 그의 나이프처럼 날렵하게 채집하고 기록했다고 한다. 붓 대신 나이프로 나타내는 리듬은 덧대고 떨어져 나가는 청음이 자연 속에서 역동하는, 빛과 색이 나타났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는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나이테이다. 이를 과감하게 끊은 단층의 틈 속에 배어나오는 색은 자연을 청음하는 과정, 감응의 울림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 흐름에 따라 빛나는 언어와 단어를 기록한 레코딩과도 같다. 마치,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콘셉트 앨범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소리의 이미지를 모은 흔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청음
“자연은 무의식적 정신이고, 정신은 의식적인 자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석 화백은 이 귀한 소리들을 바닥면으로부터 프로타주(frottage) 하고자 거꾸로 위에서부터 물리적인 마띠에르와 스크래치 기법을 사용한다. 유형의 시적운율을 색으로, 무형의 시적운율은 빛으로 표현하고자 평면 위에 색을 두껍게 입히고 패이게 하며, 다시 입히고 패임을 반복하는 과정은 흡사 지구와 자연이 수십억 년에 걸쳐 해 온 섭리와도 일맥상통하여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 흔적들은 불규칙성 속에서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통해 생성된 새로운 소리”의 캐리커처라고 볼 수 있다. 오랜 숙고와 재빠른 손놀림은 이 독창적인 언어를 속기하듯 새로운 유형의 소리를 기록해, 전시장에 옮겨져 자연의 사유에서 나오는 거대한 울림을 서라운드로 재생한다. 그래서 자연의 소리 연작들은 각 테마에 맞게 단독으로, 혹은 세트로 구성해도 어울릴 패턴이 숨어 있으며 23년 전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에 배를 띄워 들었던 가녀린 새소리, 바람에 살랑거리는 갈대처럼 매혹적인 형상이다. 패여 나간 물감이 만든 자연스런 음영들은 자연의 소리들이 연주하는 무대에서 셈여림부터 웅장한 크레셴도까지 갖추고 있다. 흥에 겨워 나이프로 허공을 가르는 지휘자, 석 화백이 휘두른 지휘봉은 캔버스 위에서 피겨스케이터가 스텝시퀀스를 연기하며 남긴 은반 활주 흔적처럼 변화무쌍한 리듬까지 갖추고 있다. 석 화백의 화풍에서 추상화의 조류 끝자락보다 다른 종합예술의 흔적을 찾는 것이 더 쉬운 것도 이러한 사유에서다. 그는 소리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색감을 찾아내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더욱 왕성해진 작업속도와 거대해진 출력, 내년 4월 3인전 예정
석 화백은 은퇴 후에도 명예교수로서 학생들의 창작을 조언하고, 남부현대미술협회의 부이사장이자 청강미술관장으로서 사회활동과 창작을 병행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 현상의 파장만큼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으며, NFT토큰화 외에 새로운 미술플랫폼이 나타나도 시대에 적응하고 진보해 나갈 뜻을 밝힌 그는 ‘자연의 소리’ 테마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편 이처럼 너무나 열정적인 작업 속도는 석 화백의 작품 타이틀 개수를 늘려주었지만, 한편으론 창작자 입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 창작자도 결국 인간이기에, 소리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려면 힘을 잘 안배하고 시간이라는 자산도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그래서 캔버스 위 요철은 좋아하지만 좁은 작업실의 요철은 성가시기에 문턱도 없앴다는 석 화백은, 올해 큰 캔버스로 작업한 후 옮길 때마다 힘쓰지 않도록 더 큰 작업장으로 옮길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개인테마전을 위해 제주도 전시를 계획하고 있으며 다양한 전시형태에서 시각적 청음과 이미지를 차용한 소리의 드러냄에 기꺼이 캔버스 앞에 서겠다는 석 화백의 어조에는 여전한 기백이 느껴진다. 2023년에도 검은 토끼해라고 특별할 것 없으며, 작업실을 옮기면서 그저 작가로서 계속 그림과 전시를 준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는 4월 6일부터 2주 간 개최될 3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4월 3인전에서 석 화백은 프랑스를 무대로 삼은 빛과 양감의 마띠에르 화가로 알려진 곽수영 작가, 전 홍익대 미대 교수이자 창작에 전념하는 주태석 교수와 서로 다른 테마로 전시장을 채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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