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忌日)을 받은 나무에 생명을 새겨 불멸이 되는 서각예술
기일(忌日)을 받은 나무에 생명을 새겨 불멸이 되는 서각예술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3.01.17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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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으로 깊이 집중하여, 검증된 지혜를 각인하고 세상에 내보낸다”
서각인 기일(己日) 강경구 작가
서각인 기일(己日) 강경구 작가

‘마철저(磨鐵杵)’의 유래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상의산에서 학문을 포기하고 하산하던 중, 쇠막대를 갈아 바늘로 만드는 노인에게 감명 받고 돌아가 책을 편 일화에서 나왔다. 천년좌우명으로 동서양의 사랑을 받은 이 글귀로 2021년 제25회 통일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서각인 기일(己日) 강경구 작가는 장기를 이식받아 새 삶을 얻고,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늦은 나이에 서각을 시작해 31번 공모전 출품에서 31번 모두 수상작을 내는 작가가 되었다. 강 작가는 매년 고사성어가 새로 나오는 연말연초에 어울리며, 나무에 새기는 과정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는 참된 정성의 예술이라며 서화와는 다른 매력을 갖춘 전통서각의 덕목을 이야기했다. 

기일을 두려워하던 삶에서 새 인생 얻어 기증이라는 덕목 새기다

한국미술협회 정회원이자, 2021통일미술대전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서각인, 63세의 강경구 작가는 본래 미술인이 아닌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남들처럼 정년퇴임을 준비하며 새 인생을 개척할 나이에 간경화를 진단받고 간이식을 받은 그는, 뇌사로 떠나며 장기를 남겨 준 이름 모를 은인에 감사하여 정신수양 차 서예와 서각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50점 가량 만들었다. 정신이 생생하면 육체는 따라오는 법이라 시작했는데, 작업이 고된 반면 할수록 건강회복에 도움이 되었다”는 강 작가는 기일(忌日)같은 운명을 기일(己日)로 바꾸어준 서각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한 점마다 최소 20시간을 들여 보통 한 달 정도 끌, 망치, 칼로만 다듬는다. 서예처럼 정신집중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해 수련과 수양을 한다는 생각도 든다” 강 작가는 개인전을 하지 않는데, 개인전을 하는 과정에서 갤러리와 함께 작품을 판매하는 관례가 있어 그는 이름 모를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는 마음에서 작품을 전부 기증, 혹은 기부한다. 사회봉사에 힘쓰거나 작품의 적임자가 될 소장자를 찾아 제작비용도 받지 않고 기부하는 그는 앞으로도 작품을 소장할 생각이 없다고 전한다. “조상들의 고사성어와 격언을 각인하다 보면 마음속에 지혜를 새길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검증된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인내와 바른 마음씨를 지녀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보는 사람도 새기는 사람도 건강해지는 예술이 바로 서각이다” 이렇게 덧붙이는 강 작가는 기술이나 서체로도 서각의 매력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음각과 양각, 그리고 복합적인 4가지 각인법이 있어 한 번의 실수로도 수정이 되지 않아 쉬어 가면서 한 달은 잡고 작업해야 한다. 복합각인은 자칫 헷갈릴 수가 있어 늘 공들여 작업한 덕분에 그의 작품은 출품작 31점 모두가 국전의 특선을 비롯한 여러 수상 경력이 붙어 있으며, 가장의 병을 걱정하던 가족들 앞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것도 적지 않은 행복이라고 한다. 

섣부른 모방을 자제하고 어긋남 없는 마음 지니면 바른 작품 나와

자식과도 같은 작품이지만 전부 의로운 장소에 출가시키고, 상장과 도록만으로 간직하는 강 작가는, <마철저(磨鐵杵)>로 받은 통일미술대전 대상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통일미술대전은 통일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바늘이 된다는 노인의 마음가짐처럼, 언젠가는 녹슨 철마도 끊어진 남북 철로 위를 달릴 날이 올 것이라는 염원으로 새겨 기쁘게도 큰 상을 받았다” 서각의 주제에 맞는 서체를 고르고, 한글과 한자의 서체와 필법을 서예로 단련해 온 그는 전서체의 필법을 좋아하며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 경력이 있다. 특히 국전에서 특선을 받은 고요함 속의 움직임, <정중동(靜中動)>도 자신의 인생을 담은 것 같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음각과 양각을 두루 연습하며 획 간의 부드러운 선을 살리는 과정은 묵으로는 내기 힘든 회화와 조형 사이의 어떠한 심오한 경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40×100 규모의 서각 기준으로는 상당한 대작이 될 작품에도 자주 도전하며, 100% 수작업으로만 하는 전통서각의 색조 규정과 파임의 정도에 따라 명도가 정해지는 작업 깊이를 구현하고자 고심한다. 또 퓨전 캘리그래피 서체를 지양하고 정통 서예서체를 담백하게 받아들여 조합하는 전통서각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쉽다는 양각보다는 난이도가 높은 음각을 주로 선택한다. 나아가 강 작가는 서각에도 철학을 정립하고 마음을 정결히 가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자 먼저 공부하고 많은 생각을 거쳐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자 모방을 자제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죽어서 토막으로 남은 나무에 글귀를 새겨, 종이 위 글귀보다 영속적인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그래서 서각의 서체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이름을 짓는 것처럼 정성 들여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서예인구도 점점 줄고 있지만, 육체적으로 노고가 깃들어 더더욱 입문인구가 줄어드는 서각인구 보존을 위해서도 서각을 전통예술로 보고 접근하는 정책과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한다. 체력소모가 커서 몇 개월간 안식기간을 잡고, 이번 새해를 맞이해 좋은 서각글자를 고르는 강 작가는 작가들의 ‘숙제’ 같은 개인전이 없는 대신 공모전을 데드라인으로 생각하고 작업한다. 보통 공모전은 초대작가로 진입할 때 필요한 포인트 개념의 점수가 있으며, 다 채우면 출품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출품점수가 남은 공모전을 준비하는 한편, 회원전과 단체전 등 판매 목적이 아닌 전시도 생각 중이다. 끝으로 강 작가는 “소유욕과 물욕은 없지만 그래도 대회 수상과 후학양성의 바람은 있다. 그러니 정직한 작가, 후대에도 작품에 공들이고 훌륭한 이름을 남기는 작가, 좋은 일을 많이 한 작가로 기억되도록 작품 앞에 겸손하며 묵묵히 정진하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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