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의 열정으로 포은 선생의 사행과 시대를 앞선 국격상승 흔적 찾다
종손의 열정으로 포은 선생의 사행과 시대를 앞선 국격상승 흔적 찾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2.07.1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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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의리충절의 문하시중, 명 황제의 공감 얻은 진정한 외교공신”
“문무겸비 사절로서 중국 항구도시와 한중수교 바닷길 연 업적 기억하고자”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정암통상(주) 대표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정암통상(주) 대표

한국인의 대표 중국고전위인이 공자라면, 중국에 깊은 인상을 준 한국 위인은 단연 포은 정몽주 선생이다. 성리학자들의 귀감이 되는 충절과 함께, 올 들어 여말선초 사극의 주요인물인 포은 선생의 새로운 일면을 부각한 드라마에 힘입어 그의 높은 기개는 물론, 고려 성리학 기반을 닦은 ‘동방이학 조종(東方理學祖宗)’이자 시학에 능하며 동북면 조전원수로서 병법론에도 능한 문무겸비도 함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중국 태항산·길림지구의 항일투쟁과 교육사업으로 2011년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표창을 받은 고철 정철수 선생의 아들이자 사업가인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은 “포은공파 종중은 포은 선생을 기존 인식인 고려충신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사행길 개척자이자 유능한 외교관으로서 온당히 기억될 수 있도록 포은 선생의 유덕선양사업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포은 선생의 중국 사행길을 따라 동상과 흉상을 봉안하고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해상 실크로드> 기념 중국 12도시 순회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정 종손으로부터, 봉안사업의 의미와 사연 및 포은 선생이 외교문화 분야에서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를 자세히 들어 보았다.

대종가 종손의 도리로 한중문화융성 기여한 포은 선생의 여정 되짚다

영일정씨 900년 전통 형양공파(滎陽公派)의 대종가 종손이자 포은공파, 포은 정몽주 선생의 24대 종손인 정래정 종손은 중국항일운동 후 정착했던 고철 정철수 선생의 아들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에 영구귀국한 정 종손은, 종택과 영당을 개건하고 2014년 포은묘소 정면 대덕산(大德山) 자락에 포은종가와 영당 안치 후, 포은유덕선양사업으로 포은 선생의 흉상과 영정의 봉안·제막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2008년 5월 10일 포항시 포은중앙도서관, 2014년 10월 22일 영천시 임고서원에 포은 선생의 흉상을 봉안한 그는 같은 해 12월 23일 용인시 포은아트홀과 2015년 영천시 포은생가에 포은 선생의 동상을, 12월 13일 포은초등학교에 흉상을 각각 봉안·제막하고 2006년에는 경기도박물관에 2011년 12월 23일 보물 제1101-2호에 지정돼 역사적 자료가 된 종가 가묘 궤장본을 복원기증하기도 하였다. 

고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중국어대사전 집필교열에 참여한 이력이 있으며 포은공파를 대표하는 정 종손의 이 역사적 행보는 국내 뿐 아니라 중국에서 더욱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능원리의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와 개성5부학당 및 지방향교제 연계의 창시자다운 전국 향교 및 영천시 복원생가를 비롯해, 한국에서 포은 선생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정 종손은 포은 선생의 잊을 수 없는 큰 업적은 바로 일본 1회, 명 6회에 달하는 바닷길 외교활동인 사행에 있으며, 중국인명사전인 <사해(辭海)>에 오른 이 업적이 고철 선생과 정 종손의 귀국 결심과 유덕선양사업 시작의 근거라고 한다. 이에 따라 정 종손은 본업인 무역업에 필요한 한중 바닷길을 연 포은 선생의 귀한 업적과 사행길을 따라 동상과 흉상을 봉안하고,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해상 실크로드> 순회일정에 참여하며 고려 말 바다를 누빈 포은 선생의 호방한 정신을 현지에 널리 알리기로 한다. 

목숨 건 충신의 바닷길(海路), 후손은 꽌시를 넘어 역사현장으로 남겨

20여 년 간 정 종손이 이어오는 포은 선생 봉안사업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 일편단심의 상징에 오른 포은 선생보다는, 종사관(從事官)으로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을 따라 화주(和州)에서 여진(女眞)을 정벌하며 병서 진술을 논하고 이민족의 침략을 대비한 문무겸비를 상기시켰으며, 위화도 회군 이후에도 해상무역분야를 의심한 명 홍무제(주원장)가 특별히 뱃길을 열만큼 신임한 당대 최고의 사대부 외교사절 포은 선생을 부각하고 있다. 포은 선생에 영향을 준 정명사상(正名思想)을 만든 공자의 나라,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시 공자연구원(孔子硏究院)에는 2008년 6월 6일 봉안된 포은 선생의 흉상이 있다. 제1차 한중학술대회개최를 기념하며 성사된 이 봉안은,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시행과제가 재구성되는 소위 ‘꽌시’가 강한 중국 지방공무원체제를 넘고자 자료를 모으고 친분을 입증하는 다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정 종손은 평생 해로사행에서 총 3회를 봉래(펑라이)의 해로를 건넌 포은 선생이 1372년 첫 사행으로 명 홍무제를 알현하였으며, 여순에서 출발하는 뱃길 최단거리인 봉래(蓬萊)는 과거 등주(登州)라 불리며 사신과 상인이 여기서 배를 내려 육로를 시작해 고밀-제성–일조-회음–범강호–양주 등을 거쳐 남경으로 향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2005년 7월 등주항 서남쪽에서 한국 고선박이 2척 발굴된다. 정 종손은 이에 따라 2009년 8월 20일, 봉래각 등주박물관에 산동지역 언론과 한중관계자들이 주목한 포은 선생의 흉상과 시판을 봉안하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귀국 중 허산에서 해난사고로 13일을 표류하며 홍무제의 외교친서를 지킨 포은 선생이 쓴 귀향시 <등주과해(登州过海)>는 물론,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홍무제가 2년 후 1374년 전통 등주해로등재를 윤허하며 등주의 항구도시 승격에도 한 몫 하였다는 점이다. 정 종손은 이러한 일화에 중국 공직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그의 노력을 인정받아 여말선초 선박무역유적을 모은 봉래수성 고선박물관개관 기념으로 2012년 5월 17일 중국 영파미술대학 매법채 교수의 작품인 포은 선생의 석상을 봉안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년 묵은 고려 조공빚을 용기와 지혜로 갚은 포은 선생의 외교성과

이어서 정 종손은 중국 5대 주석 강택민(장쩌민)의 고향이자 당나라의 주력도시, 중국개혁 이전의 문화도시이기도 한 양주시는 포은 선생이 포은집에 많은 시와 사행 일화를 기록할 만큼 그의 사행길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2013년 10월 25일 양주시와 경기 용인시의 자매결연도 이뤄졌으며, 양주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에 작성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나당 문화의 첨병이 된 최치원 선생 동상을 봉헌한 양주 당성유지박물관(唐城遺址博物館)에서의 양주대 포은학회 제 7차 국제학술대회와 함께, 양국 관계자들 및 포은학회 및 포은공파 종인들이 포은 선생의 동상을 성대히 봉헌하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정 종손은 선물에도 물량만큼 품격이 필요한 중국 관료들의 성향을 분석할 때마다, 포은 선생의 일화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정 종손이 2019년 7월 24일 중국의 명소인 8대천궁과 7대회관 중 하나인 절강성 영파시 절동해사민속박물관(浙東海事民俗博物館)에도 포은 선생의 동상을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은, 1384년 다시 홍무제의 성절사로 고려의 청시승습표(请谥承袭表)를 받들고 배를 탄 일화 덕분이었다고 한다. 첫 남경 귀국길에 허산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홍사범 외 39명이 익사한 가운데, 포은 선생은 명의 자문이 유실되어 남경에 입국하여 재차 받아온 명의 친서를 13일간 지키며 무인암도에서 표류 연명하며 홍무제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뒤에도 다시 남경으로 향한 의로운 행위로 한중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했다. 이후 포은 선생이 생존한 조난사고로 인해 남경과 고려 간의 사행노선이 수육로 겸용노선으로 변경되는데다, 남경↔경항 대운하 강소내수로↔산동 내륙육로↔산동반도 북단 봉래↔묘도열도 해로↔요동반도 남단↔요양 육로↔의주↔개성의 노선이 생기게 된다. 또한 1384년 사행길의 빠듯한 일정은 날짜를 못 지킨 죄인으로 만들거나 난파로 궤멸시키려던 친원파의 계략이었음에도, 지형과 수로를 연구하며 정시에 도착한 포은 선생은 친명파로서의 충직함을 깨달은 홍무제로부터 치하 받으며 공민왕 때부터 누적된 5년 치 조공을 탕감하고 억류된 사신들까지 석방되는 포상을 받게 된다. 

홍무제는 이 인연으로 훗날 조선으로 국호가 바뀌었을 때, 아들 영락제의 황명조훈에서 “정벌이 어렵지는 않으나 일개 관원도 죽음을 무릅쓰고 예를 다하는, 대국의 풍속을 능히 이해할 나라”로 칭하며 속국정벌 대상에서 삭제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니 이는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또한 징항대운하를 타고 저둥운하를 거쳐 닝보에 도착한 인연으로, 2019년 중국 닝보일보는 중국의 <일대일로 해상 실크로드>전의 주요 고려인사로 포은 선생을 꼽기도 했다. 

일본에도 전해진 고려외교관의 업적, 한중이 함께 추앙하다

이처럼 포은 선생의 호방하고 위대한 바다 사행길을 따라 정 종손은 한중 양국에 흉상 5점, 석상 1점, 동상 4점을 봉안하며 <일대일로 해상 실크로드>의 순회전인 산동성 봉래시 등주박물관, 고선박박물관, 복건성 복주시 복주박물관, 장주시 장주박물관, 천수지 천주박물관, 강소성 남경박물관, 양주박물관, 광서성 북해박물관, 광동성 광주박물관 등 황궁과 국가역사문화명성, 유적명소 등으로 지정된 12명소 순회전에도 포은 선생의 흉상과 영정을 선시했다. 
또한 포은 선생은 2년간의 언양유배를 끝내고 위험한 일본 사행길에 나서야 했으나, 명이 고려와 일본에 외교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양국 간에 상호 협조와 사신파견으로 우의를 돈독히 하자는 제안으로 일본을 설득하며 이마가와 료순(源了俊)을 비롯한 지식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주지와 승려들이 줄을 서서 포은 선생의 시(詩)를 감히 가보로 삼겠다고 청할 만큼의 명성도 쌓은 바 있다. 태재부·관세음사·동장사·성복사·천만궁·홍로관을 포함한 규슈지역에 주재한 9개월 동안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포은 선생은 양국간 최대 현안(懸案)인 ‘왜구의 금압’에 상호 협조하자는 조약도 받아내, 울릉도와 독도를 수호한 안용복처럼 한반도사의 한일관계 정립에서도 귀중한 사료를 더 먼저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규슈와 문부성이 여전히 일제강점역사에 미온적이며 포은 선생을 비롯한 모든 한국 인사들의 동상봉안 건립을 거절하는 가운데, 규슈대학에서 제4차 포은학회 국제학술대회를 성사시킨 정 종손은 후손들을 위해 역사의 진실을 곳곳에 남겨두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로 바로 이 점을 언급하며 “종손으로서 포은 선생의 일화에 동질감을 지닌 중국에 그분의 위대함을 길이 남을 입상으로 봉안하는 책임감은 이토록 크다”라고 다시금 강조한다. 정 종손은 코로나로 중국 일정을 쉬는 동안 포은 선생의 주요 사행길인 곡부(曲阜), 등주(登州), 양주(揚州), 영파(寧波) 못지않게 사행에 의미가 큰 남경이라는 목표에도 큰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풍랑에서 살아남아 남경을 향한 포은 선생의 위대한 충정의 일화로 종손 정보(鄭保)가 사육신을 옹호하고도 세조의 거열형을 면제받는 등 가문의 영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 종손은 마지막으로 “북경 천도로 강등된 후에도 여전히 과거 문화융성시절의 진품유물로 가득해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 남경에도 반드시 포은 선생의 동상을 봉헌하고자 한다”는 그의 굳건한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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