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후 재구성된 활자들의 유기적 응집과 파노라마, 다시 유럽으로
해체 후 재구성된 활자들의 유기적 응집과 파노라마, 다시 유럽으로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1.11.1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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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취리히 아트페어 컬렉터들도 활자 파편들 속의 유영에 동행”
박종태 작가
박종태 작가

오래도록 회화에서 인쇄물은 변형 없이 정교히 그려졌고, 조르주 브라크가 캔버스에 신문지를 오려붙인 파피에 콜레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했을 때도 본래 그대로의 형질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만지기’ 아티스트, 박종태 작가를 만난 인쇄물은 그야말로 파괴를 통한 창조의 공식에 따라, 활자의 분자가 숨겨진 한 덩이 종이뭉치로 돌아가 환생의 윤회를 겪는다. 그가 찢은 책의 낱장은 텍스트의 해체를 통해 본래의 성향을 잊고, 작가가 리디자인한 문명의 세포로 돌아가 군집과 확장의 카오스적 생애주기를 겪으며 거대한 그리드의 일부이자 문명의 상징으로 박제된다. 강렬하고 푸른 연못을 헤엄치듯 이러한 ‘심연에서 유’ 테마작으로 세계에 깊은 인상을 준 박 작가는 올 가을 <KIAF2021>이후 11월 쿤스트 취리히 아트페어로 향해, 지난 2년 간 그를 손꼽아 기다려온 유럽 갤러리와 마니아들의 갈증을 해소할 해외 스케줄을 시작한다.

리사이클의 세련미로 희망의 블루를 유영하는 인간·문명적 색면추상
박종태 작가의 종이만지기는 회화이자 소조로, ‘심연(深淵)에서 유(遊)를 테마로 하여 창조의 전제인 파괴로 재창조를 추구한다. 이는 활자를 가진 책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설치미술로서, 세련된 리사이클 아트인 종이반죽과 사각, 원 등 도형 형태의 군집과 도열이라는 연속성으로 부활시키는 증식·복제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 본디 종이를 개어 탈바가지를 만들고, 옹이구멍을 채우던 행위는 가장 한국적인 소조방식이기도 한데, 이 관성적 행위가 서양미술의 콜라주 유파를 만나고 메시지가 강한 사회과학이론을 숙지한 작가의 손에 닿게 되면 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심연의 캔버스를 이룬다. 박 작가의 작업방식은 의외로 소박하여, 인류의 마음의 양식을 일일이 찢고 으깨서 접착제로 패널에 겹겹이 붙여내는 단 한 가지 행위가 반복된다. 하지만 20세기의 콜라주 장인이었던 브라크와 피카소도 이르지 못한 이 묵직한 양감의 세계는 반복되는 관성의 중첩행위로써 오묘한 패턴을 이룬다. 이 오브제들은 문명을 상징할 뿐 아니라 예지와 암시도 할 수도 있다. 패널 한 면의 일부가 되어 아우성치는 활자 파편들의 은유가, 심연이라는 궁극의 지평선 안에서 끝없는 파도 속 풍어(豐漁) 월척을 낚는 그리드 콤포지션으로 완성되며 다양한 서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명의 미래에 대해 파괴가 전제된 재창조 행위로 응답한 박 작가의 작품이 여느 색면추상과 달리 미지의 압박감과 공포 대신 충만한 에너지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행위가 어떠한 부가해석 없이도 납득할 수 있도록 서양문명에서는 ‘리사이클’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단어로 정의된 까닭이다. 갤러리 제이원과 코엑스 화랑미술제를 압도한 그의 희망적이고 푸른 직사각형 판넬들은 지난 10월 대구 봉산미술제 단체전에도 선을 보여, 박 작가가 설명한 작품조합에 따른 연속성, 관계성이 공존하는 의미와 함께 그가 해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생각하게 만든다. 

오브제의 그리드 콤포지션과 스퀴드, 유럽 갤러리에 제시된 ‘블록게임’
지난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된 <KIAF2021>에 ‘심연에서 유’ 연작인 판넬과 오브제 패턴 11점을 소개한 박 작가는 도형 형태의 군집과 그리드, 해체, 그리고 결합으로 형상의 역동성을 만드는 설치미술을 한다. 종이만지기로 만든 크고 작은 블록 오브제들은 전시장에서 공간과 작품의 관계성과 스토리텔링을 이뤄가는 소재들이다. 이 미니멀리즘적인 무채색 혹은 푸른빛 콤포지션들은 사람들에게 상호작용과 탄생, 죽음과 픽셀이 모여 그리드를 이루고 나아가 작은 점이 모이듯 물고기나 사람이 공동체로 묶이는 유기적 구조까지 설명한다. 이러한 오브제의 피규어화는 우주의 대폭발과 새로운 별의 탄생이라는 ‘관계성 유니버스’로도 이어지며,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오브제들을 도형의 형태로 모으면 평면이라는 한계선을 넘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박 작가는 스위스의 대표적 아트페어인 쿤스트 취리히 아트페어에서, 동양작가 중 유일하게 3회의 초청경력이 있을 만큼 유럽인들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스위스 미술언론인 안토니오 캄파닐의 호평을 바탕으로 스위스와 독일 갤러리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순탄하던 그의 유영은 코로나로 인해 2년 간 막혀 있었지만, 그럼에도 해외 갤러리들의 러브콜은 끈질겼다. 
특히 재활용이라는 기법에 수성안료를 사용하는 그의 작업방식은, 작품의 메시지와 작가사상의 일치를 원하는 해외 갤러리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시각적 충격을 잊지 못한 컬렉터들의 오랜 요청에 따라, 박 작가는 올해 코로나 2차 접종을 완료하고 11월 취리히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국내의 KIAF에서도 드러났듯, 요즘은 미술시장의 구매자와 창작자 모두 취향이 확고한 MG세대의 역할이 두드러지는데다 창작 세계관과 스토리가 뚜렷한 작가들이 컬렉터의 지지를 받는 상황이다. 
박 작가는 유럽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내년에도 그의 픽셀 콤포지션을 다시 소개할 예정이다. 한국은 이미 여러 창작매체를 통해 소위 데쓰매치 스토리텔링의 창의성으로 세계인의 인정을 받아왔기에, 파괴와 재창조를 가장 스마트하게 표현하는 그가 재구성한 ‘책의 화석들’이 아우성치는 이야기는 분명 관계성을 중시하는 독일과 스위스 갤러리들을 다시금 충분히 사로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슬치기보다 더 흥미로운 경우의 수가 있는, 그의 종이만지기로 던진 블록게임 제안을 유럽 갤러리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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