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로 쓴 한 폭의 시, 한 편의 노래 같은 현대적 한국화.
명사로 쓴 한 폭의 시, 한 편의 노래 같은 현대적 한국화.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1.02.15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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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처럼 농익은 장지기법을 넘어 새로운 미디어로 한국화의 미래를 비추다”
이송 김선두 화가/ 중앙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과 교수
이송 김선두 화가/ 중앙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과 교수

2년 전, 제 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미술부문을 수상한 김선두 작가는 전통기법과 현대 미디어아트와의 실험적 시도에 대해 “작가적 정체성, 그리고 살아있는 시대와의 조화”라고 설명했다. 시서화 삼절의 남종문인화로 이름난 부친, 소천 김천두 화백으로부터 호인 이송(二松)을 받기도 한 그는, 수묵과 채색의 한계를 깨고 모든 화가들의 이상인 자기만의 색감과 필선을 오래 전 완성한 바 있다. 고향 장흥의 동향작가 이청준과 문학과 지성사의 이청준 전집 등 많은 문학 그림 작업을 하였으며,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의 손 대역, <남한산성> 초판본의 표지 작가로도 명성을 떨친 작가는 이제까지의 형식을 넘어 다양한 재료기법과 소재연구로 기존에 없는 한국화 장르를 보여주는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지금 그의 창작의 아궁이에서는, 고전의 문구부터 도로 표지판까지 일상의 편린들이 휴대전화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여 좋은 땔감으로 타오르는 중이다.

편안하고 자전적인 고백 들어간 ‘느린 풍경’과 ‘너에게로 유턴하다’

이송 김선두 화가는 일명 ‘58개띠’ 세대, 농경에서 산업화, IT정보화를 거쳐 AI/IoT 4차산업시대라는 단군 이래 최대격변을 겪은 베이비붐세대를 대표하는 한국화가다. 이처럼 어느 한 사조 소속보다는 변화 속에서 철학을 펼쳐 보인 그는, 도시거주자의 현실도피보다는 유년기 고향 장흥의 기억을 토대로 과거 잃어버린 노스탤지어를 찾는 연작 ‘남도 시리즈’를 그렸다. 그 역시 처음에는 도시로 올라와 평범한 노동자와 서커스 곡예사들의 따뜻한 일상에 관심을 갖고 인물화를 그렸지만, 자신의 정서와 미감의 뿌리가 유년기를 지탱한 땅, 흙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전적인 추억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이는 인물화 중심인 서양화가 아닌 산수화 중심의 미술사로 전개된 동양화로 21세기를 해석한 자신만의 산수화를 그리기 위함이었다.

‘남도 시리즈’는 구도와 붓질에서 어깨 힘을 빼고 예스러움과 소박함이 깃든 고졸미를 보여준 화풍의 시작점이었으며, 색이 있는 풍경에 지역적인 양식을 일부 빼내고 한국적인 선묘를 느린 호흡으로 전개한 ‘느린 풍경’의 프리퀄 격이다. 마치 벨팅과 두성을 아우르는 신예 테크니션보다는 특별한 기교 없이도 시청자들을 압도하는 <불후의 명곡> 중견가수들처럼, 동양철학을 마스터하고 산수와 화조의 의미를 체화한 한국화 대가들의 길이, 작가가 추구하는 여백과 ‘느린 풍경, 느림의 철학’의 실체였다. 그래서 창작과 강의, 전시 스케줄에 지친 그에게 ‘유턴 시’라는 도로표지판의 글씨는 때 시(時)일지라도 시와 시간의 중의적인 의미로 보일 만큼의 여유 정도는 있었고, 이는 2010년의 잃어버린 나와 타인이 되어버린 너로의 회귀를 뜻하는 시와 그림의 이야기, <너에게로 유턴하다>라는 서정적인 개인전 테마가 되기도 했다.

앤디 워홀 이래 현대 한국화에도 형식과 재료기법이 곧 주제라는 것이 중요

시에 어울리는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작가는 소동파의 “시 속에 그림이,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는 구절을 좋아하여 말하는 그림인 시와 말 없는 시인 그림을 모두 추구한다. 그래서 어느 비 오는 저녁. 천천히라고 쓰여진 교통표지판 너머 노을의 역광에 그라데이션 된 북한산 자락의 숲으로부터 “느리게 가라”고 작가에게 충고하는 반사경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미지로 구성하는 새로운 형식의 느린 풍경 시리즈를 시도한다. 작가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비유법이므로, 힌트를 다양하게 담는 영화나 소설과 달리 단 한 장의 장면으로 축약해서 보여주는 그림은 “명사로만 쓰는 시”이기에 소재와 주제를 찾는 작업이 가장 까다롭다.

앤디 워홀이 산업혁명 이래 개성을 지닌 듯 공산품으로 획일화된 세대를 친근한 캠벨 수프를 소재로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표현했듯이, 그는 한국화라는 고유의 자산과 소재들을 이용해 새로운 형상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1980년 일랑 선생의 전설적인 한국화 스터디그룹에 들어가 벽화기법, 견화, 동유화, 옻칠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작업을 선보이는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자신만의 다양한 장지기법을 통해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그 만의 장지기법에서 색의 스밈과 번짐, 색의 집적을 통해 관용의 미학과 겹의 미학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기에 장지화는 묵은김치나 깊은 장맛 같은 느낌을 내기 위해 평균 30회 덧칠이 필요하다. 작가는 이처럼 철저하기가 12첩 반상의 찬을 만드는 것에 비견되는 한국화 재료기법을 자기 것으로 활용해, 때로는 아이의 크레파스놀이처럼, 혹은 고분화의 기호형상과 같은 천진한 나무와 숲을 표현하였으며 틀에 박힌 구도와 원근법을 벗어난 장지화로 힘찬 필선과 유머러스한 해학미를 계승하고있다.

철조망 블루스와 마른 건어물, 일상에서 길어올린 실험정신

주변에서 소재를 찾는 낭만적 현실주의자, 그는 현대 한국화가 지닌 문제들이 현대 미술의 어법과 동떨어진데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해서도 직관적인 대안을 냈다. 한때 질경이와 엉겅퀴, 고사리등의 잡풀과 언덕과 밭의 유장한 곡선의 진경작업을 해왔던 그는 해남 건어물 시장의 마른 북어, 도미를 마주쳤을 때 이 시대의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의 괴물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한때 싱그럽고 유연했던 물고기가 말라붙어 반으로 갈라진 후로는 사고가 죽어 완고해진 괴물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 한국화의 컨셉에 맞는 소재도 일사믜 구체적 사실에서 찾았다.

특히 이 주제에서는 진한 먹으로 중봉으로 그은 갈필이 제격이었으며, 낡아빠진 붓털의 퇴필은 자동적으로 갈필의 비백을 그려 건어물의 마르고 까끌까끌한 느낌을 두터운 장지에서 잘 표현하였다. 작업실 인근 성동구치소의 40년 묵은 철조망의 세월에서 오선지 위 블르스의 음률을 떠올리며 <철조망 블루스>라는 그만의 아트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노장의 철학도 그의 '낙원의 꽃' 작업에서 서양의 선악 대립과 다른 선과 불선(不善)은 하나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보여준다.

“선악을 단정 짓는 것은 죄악”이라 말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시행착오 속에서 내 안의 욕망을 긍정하고 점차 이를 극복한 후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좋은 작가라는 신념을 지닌 그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지닌 작가다. 그는 일반적인 한국화의 굴레나 관습을 거부한다. 한국화가 지닌 좋은 전통과 현대미술에서도 통하는 장점들은 계승하지만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환갑이 넘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계속하고있다. 그는 앞으로의 닥업은 일상에서 만나는 깨달음을 주제로 거기에 가장 잘맞는 형식과 재료기법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자세를 견지하고있다. 그것은 장지기법은 물론 유화나 아크릴, 설치 영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 것이다. 그는 이런 변화된 작업을 올 봄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전과 연말에 강동아트센터 온 오프라인 개인전에 각각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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