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보급의 거점, 중생들의 기원이 모이는 곳
훈민정음 창제 보급의 거점, 중생들의 기원이 모이는 곳
  • 임세정 기자
  • 승인 2020.11.13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흥사 주지 구견 스님
광흥사 주지 구견 스님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대략 1,700여 년이 흘렀다. 우리 역사와 함께해 온 불교는 각 시대마다 정치와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고 가르치는 신앙으로서, 왕권의 버팀목이나 호국의 방패로서 우리사회에 깊이 뿌리내려온 것이 바로 불교다. 그 중에서도 이번호 <월간 인터뷰>가 찾아간 곳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인 언어, 「훈민정음」과 연관이 깊은 곳이다. 안동과 예천의 경계에 있는 학가산(鶴駕山)에서도 가장 산세가 좋은 곳에 위치하며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의 염원과 바람을 담아온 ‘안동 광흥사’가 바로 그곳이다.

천 년의 역사가 서린 고찰, 안동 광흥사의 가치가 재조명되다
‘안동 광흥사(廣興寺)’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불교가 중흥했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왕실 원당(願堂)으로 번영을 누렸다. 조선 선조 41년에 편찬된 안동부 읍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광흥사는 국왕이 내려와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커 500여 칸에 달했으며, 암자 터가 남아있는 2개의 산성지와 산의 동쪽에는 능인대덕이 살았다는 능인굴, 산허리에는 거찰과 작은 암자들이 둘러져 있는 안동지방 최대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 하지만 현재 볼 수 있는 광흥사에선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1827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후 중창을 했지만 1940년대 또 한 번 화재를 겪어 남은 전각들마저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1960년대에 방화로 또 다시 절이 화마에 휩싸이며 현재는 본법당으로 쓰이는 웅진전과 명부전만이 남아있으며, 대웅전은 20여 년 전 새로 지어 올린 것이라 한다. 이처럼 규모 자체는 과거의 번영에 비하면 극히 축소된 것이 사실이었으나, ‘광흥사’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와 민족에게 갖는 의미는 최근에 들어서야 재조명받게 되었다.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지금껏 단 한 권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1940년대에 안동에서 발견된 후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현재는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간송본(안동본, 국보 제70호)’이 그것이다. 그러나 2008년 한 고서 수집가에 의해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이 존재함이 알려졌고, 이를 ‘상주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상주본의 출처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었고, 현 소유주가 이를 골동품 가게에서 훔친 것이라는 혐의와 함께, 그 원 출처가 1999년 광흥사 시왕상에서 몰래 꺼낸 복장유물이었다는 증언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중요한 서적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불교 사찰의 시왕상에 복장유물로 담아놓았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광흥사는 조선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광흥사 주지 구견 스님은 “광흥사는 훈민정음 해례본 뿐 아니라 조선왕실의 어첩과 유물,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적은 수많은 불교 경전을 보관했던 곳입니다. 세조 때에는 법화, 화엄 등 경전을 간행하여 봉안했으며, 세종과 영조의 친서 등 많은 보물이 광흥사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의 역할도 한 광흥사는 다수의 한글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전쟁과 화재를 겪으며 아쉽게도 현재는 남아있는 목판을 찾기 어렵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드물게 남아있던 ‘묘법연화경’ 2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또 다른 보물인 광흥사 동종은 16세기 조선 중기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다
이처럼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인해 촉발된 광흥사에 대한 관심은 지난 2013년,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의 총 200여건에 달하는 복장유물들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 유물들 중에는 ‘월인석보’, ‘선종영가집언해’ 등 조선 초기 훈민정음 창제 후 발간된 초간본들이 포함되어 있어 한글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구견 스님은 “광흥사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 여러 유물들의 발견을 통해 알려진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출처가 광흥사라는 점을 인정받는 것은 보류상태에 머물러 있어 학생들에게 훈민정음과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울러 광흥사에서 발견된 다수의 보물들 또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박물관의 엄격히 통제된 환경 아래 보존하는 것을 우선시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보물들이 원래 있던 장소인 광흥사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구견 스님은 지난 10월 말, 명부전 지장보살님과 십대명왕 점안식을 치르는 행사를 열었다. 그 의미가 남다른 일이기에 본래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계획했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소소하고 간소한 행사로 치러졌다. 구견 스님은 “평안함을 갈구하는 여러 중생들의 기원, 바람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사찰은 그 규모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광흥사는 그 규모와는 무관하게 오래전부터 나한기도와 산신기도가 잘 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매년 수능 때에는 수많은 신도 분들이 찾아와 자녀의 성공을 기원하고 계십니다. 인근에 위치한 명문 고등학교에서도 매년 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높은 학업성적으로 유수한 대학들에 합격생을 다수 배출하고 있기도 합니다”라고 전했다.
한편, 구견 스님은 10년 넘게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연화마을’의 시설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영주시에 위치해 있는 연화마을은 지적 장애로 인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모아 일자리를 제공하고, 장갑, 자동차 부품, 형광등 부품 등을 제조해 공급하는 시설로서 현재 35명의 지적장애인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구견 스님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도지사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구견 스님은 “일반적인 복지시설에 비해 후원이나 예산도 부족하고, 제조업이라는 특성상 어려움이 많지만 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모두가 한 뜻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매년 한 두명씩은 꼭 취업을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취업 후 첫 월급으로 작은 선물이라도 사서 들고 올 때면 가슴 벅찬 감격을 느끼기도 합니다”라고 밝혔다. 구견 스님과 광흥사가 전하고 있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큰 뜻이 어렵고 힘들어하는 우리 사회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