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구성은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에 대한 일종의 조형적 방향성
이중구성은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에 대한 일종의 조형적 방향성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10.26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웅장한 필세의 미루나무 너머에 파필과 측필로 꺼뜨린 비백의 나목을”
수묵산수화 전문작가 진성수 화가
수묵산수화 전문작가 진성수 화가

호방한 운필과 절제된 여백의 운용, 발묵으로 한결 실험정신이 강한 붓. 내적 변화로 동양수묵산수화의 미감을 다듬는 표현주의 수묵화가. 붓과 묵을 잘 다루어 최도송 철학박사로부터 ‘평원(平遠)구도를 기본으로 고원이나 심원에 의한 동시적인 구도의 포치를 통하여, 변화가 풍부한 필세와 채색법으로 동시대적 산수풍경에서 여백의 효과적인 운용을 통한 공간적인 깊이를 확보한 수묵화’로 평가받은 진성수 화가의 그림은 첫 개인전 이후 쭉 동양철학·예술에 입각한 경향을 보여 왔다. 이상향보다 친숙한 풍경 속에서 심원의 선경을 발견하는 진 화가이기에, 기운생동의 계절감에 트릭아트적인 조형감을 더한 풍경을 동시적인 구조로 화합시키는 최근의 ‘이중구성’ 시도는 객관성 속에서 바라본 듯 열린 시각에서의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유불선의 정신철학에 따라 3차원 공간에서 바라본 액자식 심원(深遠)
1985년 중앙미술대전 입선으로 한국화를 선보였으며, 지난 해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특별초대전을 겸한 11회 개인전을 연 진성수 화가는 노자의 철학과 공자의 이치에 따른 수묵산수화를 추구한다. 40여 년에 걸쳐 뛰어난 화면구도와 수묵필법을 보여준 진 화가는 15년 전부터 조금씩 새로운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일종의 ‘한국화를 향한 새로운 모색’이라고 표현한 이번의 구도변화는 삼원법과 삼대법 같은 정통 화법은 유지하되, 화면을 액자식 구성으로 분할한 ‘이중구성’이라고 한다. 지난 해 선보인 <우포늪의 미루나무>는 중후한 농담으로 원경의 뒷산과 대비되는 미루나무의 풍채를 담고 있는데, 명암의 원근을 강조한 액자식의 <우포늪 풍경>처럼 이번 이중구성도 내부의 나뭇가지와 창밖의 풍경을 평원에서 바라보듯 한다. 그리고 거목의 생동하는 색채를 역광에서 바라본 수류부채감이 뛰어난 <보경사 일우>와 같은 운치를 넘어 원근의 경계까지 확실하다. 마치 1차원 평면에서 2-3차원 구성을 하는 트릭아트 역할의 피사체는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일 수도, 원경 속 나무들과는 다른 차원에 그려진 나무일 수도 있다. 이런 나무의 ‘호접몽’을 만들어 낸 최근 심경의 변화로, 진 화가는 “한국화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생각의 전환은 직인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오랜 숙고와 기운을 감내할 청년기가 아니기에, 체력과 정신적인 쇠퇴를 숙련도로 극복하기 위한 작가적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허나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적 성숙 단계가 기술이 모두 완성되고 체력이 정점을 찍고 난 후부터 시작되듯, 진 화가의 진면목은 10년 전을 전후해 나타난 새로운 여백의 미와 수 년 전 시도된 더욱 새로운 화면구성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산천초목수지 자연에서 영감 얻어 인간의 시각으로 수묵예술성 가미
산수화는 산천에 나아가 스케치로 참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신념답게, 요즘 진 화가는 와병 중인 신체를 숭산의 시내와 형산의 산굴, 태산의 주봉을 경험해야 진정한 절경을 그린다는 도화론에 타협시켜 일상의 산수를 관조하는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 화가는 보이는 풍경을 화가의 눈으로 보고 수묵예술기법을 가미하는 것이 수묵화가의 진리이기에, 자연을 사진처럼 똑같이 묘사하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 화가는 과감한 원근 생략법의 <봄의기다림>처럼 논과 낙엽의 흔적을 뚫고 나오는 새잎의 희망을 마치 안개 속에서 보는 듯, 계절감의 운치를 더한 그림에도 능하다. 또한 진 화가는 절경의 기운생동 묘사에도 뛰어나다. 남제의 사혁이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저술한 화조육법의 대표인 기운생동은 사물의 풍격이 그림 안에 살아 양동함을 강조하는데, 기운생동의 다음 단계는 대상의 골조를 필법으로 잘 묘사하는 골법용필이라 하였다. 이러한 법칙을 승계한 그림이자 물과 바위를 휘감는 폭포의 색 조화와 음영, 원근의 선과 빛깔 구분이 명확한 <내연산 계곡>은 그늘진 소나무 아래 계곡폭포를 바라보는 역동적 운치가 실로 절경이다. 새로운 시도인 이중구성에도 호방한 폭포의 낙차와 유속의 느낌이 들어 있는 <희방사 계곡>이 있어, 병환 중에도 붓을 완전히 놓지 않던 그의 필력만큼은 여전히 ‘기운생동’ 함을 보여준다. 그런 진 화가가 요즘도 애착을 갖는 소재는 한겨울 나목이다. 굵기가 끊어지거나 꺼지는 파필과 측필을 숙련하는 것도 여기서 생긴 비백(飛白)의 필획을 이용하기 위해서이며, 수십 가지 먹의 농담 속에 꿋꿋이 뻗은 나목의 음영과 건조하고 쇠퇴한 껍질에 내재된 힘을 그리는 데 이만한 조화도 없기 때문이다. 

1백 년 전과 지금의 색채가 달라졌듯, 수묵을 다루는 관점도 변화
진 화가는 ‘다른 그림보다 인기가 적지만 한국화는 대단한 예술’이라는 사명감과 함께, 노자·공자의 철학이 서양에도 통용되듯 어느 정도는 의외성에 따른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인다. 특히 채색의 변화에 창작자들이 따를 필요도 있다는 그의 의견은, LED조명 색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1백여 년 전의 톤보다 화려해진 환경의 톤으로 보정한 한국화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의미다. 또 기술수양만큼 철학과 정신정립도 중요한 한국화이기에, 진 화가는 붓에게 부림을, 먹에게 쓰임을 당하지 않는 안목을 기르는 방법도 언급한다. 정통 필법과 운필은 어느 시대에도 담묵과 농묵으로 소복이 쌓인 겨울눈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수묵 한국화에서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성과 철학을 갖추고 충분히 공부한다면 소재나 구성이 달라진들 수묵의 정체성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고원의 구도로 올려다본 풍경인 <청암정>과 같은 한국화만의 매력은 여전하며, 해를 거듭해도 기운과 장수의 의미로 통용되는 대송(大松)은 농묵과 초묵의 조화로 생생함을 전하고, 우리 일상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는 나목과 와옥(瓦屋)은 언제든 화선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 화가의 참신한 액자식 이중구성 수묵풍경에는 여전히 5백 년 전의 서화들처럼 젖은 종이위에 번진 먹의 선(渲)과 어둡고도 묵직한 쇄(刷)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모색을 통해, 그리고 5년 후 다가올 고희를 위해 서울 개인전과 대구 고희전을 준비하고자 미련 없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가겠다는 진 화가의 진정성처럼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