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맥을 짚으며 동서양의 시공간과 사유를 향한 관념론에 깊이를 더하기 시작하다
‘숫자’의 맥을 짚으며 동서양의 시공간과 사유를 향한 관념론에 깊이를 더하기 시작하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8.07.12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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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여정으로 정신세계와 신앙, 생명과 전통 문화에 대한 깨달음이 융합된 예술을 탐구”
서양화가 최해숙 작가
서양화가 최해숙 작가

[서울=월간인터뷰] 정재헌 기자 = 1958년부터 만 60년간 교육자, 그리고 예술가로 의욕적인 창작의 삶을 살아 온 서양화가 최해숙 작가는 최근 60갑자의 한 회전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예술인생을 돌아보며, 시공을 초월한 동서고금·우주만물의 보편적인 암호인 ‘숫자’의 세계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하나의 맥을 잇는 주제에 대해 수많은 소재를 사용하여 도전해 온 최 작가는 이 철학적이고 광범위한 주제를 앞두고, 자신의 차기작을 준비하며 예술가들이 으레 만나게 마련인 골고다(Golgotha) 언덕이나 수미산(須彌山)을 넘는 듯 낯선 고행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이 없다.

새로운 주제를 알게 되면 관련 잡지를 구독하고 자료를 모으며 차분히 본질에 다가가던 최 작가에게, 그리고 여유라기에는 고통스런 투병을 감내했고, 해탈이라기엔 소재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이 예술가에게는 숫자란 개별적인 느낌과 상징성, 하나 이상의 이치를 가진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최 작가가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예술가의 삶을 반추하는 작가노트를 특별히 소개하며, ‘숫자’의 맥을 짚는 새로운 도전에도 열렬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I: 자연에 대한 성찰과 근원적 사유의 재구성, 그리고 무속과 전통이 공존하는 참신한 시도
경북 출생으로 부산사범대 미술과를 거쳐 1958년도부터 1996년까지 교직 및 이후 2년 간 효성가톨릭대학에 출강한 교육자이자, 이후 개인전과 초대전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창작활동을 해온 서양화가 최해숙 작가는 일반적인 정물, 인물과 풍경을 구상/반구상으로 묘사하는 것 외에도 해당 소재를 성찰과 근원적 사유로 재구성하는 유형의 예술가다. 최 작가는 교편과 화구를 동시에 잡을 무렵, 서양화를 기반으로 동양적인 사유를 통해 자연을 해체하고 유화의 색으로 재구성하곤 했다.

시각경험의 이미지를 분해하고 재구성해 형상화하는 구상으로 중등미협, 한국미협 및 이상회 등 그룹 활동에 참여한 최 작가는 정년을 한참 남겨 둔 1996년 교직을 떠나 자연의 주제를 이어가게 된다. “맑은 영혼은 맑은 영감을 만들어내며, 어떤 예술품도 인간의 선함이 만들어낸 감동을 넘지 못한다”는 설명처럼, 최 작가는 인간의 선한 심성이 예술로 승화되도록 맑은 영감을 떠올리는 수행을 했다고 한다.

한국현대미술 러시아 초대전에 참여한 1996년 8월 이후, 최 작가는 전통문화 이미지를 무속과 토속신앙의 요소로 표현하며, ‘굿’을 주제로 강렬한 오방색과 역동성, 기에 대한 자료수집을 바탕으로 민속신앙과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재해석한 작품을 1997년 첫 개인전에 소개했다. 또한 본격적인 사이버펑크적 세기말 분위기에 빠진 세상과 달리, 1999년에는 지적 초영역에 있는 ‘우주초염력’과 영혼에 빠져들면서 ‘생명과 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최 작가는 우주와 자연에 흐르는 에너지를 화폭에 담았고 이듬해 <정신세계>지를 구독하면서 인도와 네팔을 방문하게 된다.

스케치 여행을 통해 갠지스 강에 다다른 최 작가는 인도의 문명과 영혼의 존재, 윤회,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감흥을 얻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생명 관념과 기에 대한 열정을 담은 갤러리 소호에서의 2회 개인전을 개최하며 ‘비가시적 정신세계’에 극적으로 경도된 변화를 세상에 천명하였다.

II: ‘12지’의 윤회, ‘천부경’의 열림소리, 그리고 이 세상에 피어나는 생명의 경이와 원상
존재와 윤회에 대한 비가시적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는 곧 최 작가가 자연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로 주제를 옮겼음을 의미하며, 2001년에는 ‘12지’를 주제로 유화가 아닌 아크릴화, 그리고 닥지 배접을 시도하며 생명의 순환과 윤회의 시간개념, 재생과 반복되는 삶의 지혜를 상징하는 ‘띠그림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독특한 ‘12지’ 소재의 3회 개인전을 치를 무렵, 신체적인 요소인 기순환과 단전호흡 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한 최 작가는 2003년도부터 2년간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81자 ‘천부경’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최 작가는 ‘천부경’의 ‘열림소리’에 매료되었으며 이내 우주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 인간의 도리를 여는 열쇠이자 한민족 ‘홍익인간’ 문화의 뿌리,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오래된 경전, ‘단군경전’을 주제로 작품을 시작해 4회 개인전 <열림소리전>에 펼쳐 보이게 된다.

그리고 최 작가는 2005년 들어 ‘어느 영혼의 노래’라는 주제로 영혼의 순환을 다루는 생명체로서 하늘과 땅의 매개자이자 영혼의 부름을 상징하는 새, 나비를 다루면서, 5회 개인전인 <모레아 초대전>을 개최했으며 작가 화집을 발간했다. 이듬해는 미술세계 기획 초대전을 개최하는 중, KBS아침드라마인 <그 여자의 선택> 촬영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십이지’의 윤회의 원리, ‘어느 영혼의 노래’, 그리고 ‘천부경’의 열림소리를 함께 묶은 원상작업인 두산아트센터 개인 7회전인 <원의 단상전>에서는 소위 ‘원상’의 개념을 정립하며 동양의 전통적 시공간을 탐구하기도 했다.

III: ‘아사달’과 그리스도 사이의 접점 탐구, 원과 도형 이전의 보편적 윤회 암호인 ‘숫자’로
2008년 기존의 주제에 화(和)를 더한 이미지를 시도하며 대구원로미술인회 창립전 <和>, 영호남 미술교류전을 위한 <하루와 영원사이>를 작업하던 최 작가는 와병으로 2년 간 병상작업이라는 악전고투 속에서 작품을 완성해 출품하게 된다. 회복하는 대로 단군신화를 주제로 한 ‘아사달의 빛’을 작업하겠다는 의욕의 최 작가는,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신앙생활에 접어들면서 2013년까지 영성과 바이블에 대한 테마 작업인 <내 삶이 작품이게 하소서-나의 기도>와 <불사조>, <거룩한 날>, <성사>로 탐구나 깨달음이 아닌, 병상에서의 삶이 곧 작품의 주제가 되는 작품을 연달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에는 대니얼 샤모비츠의 <식물은 알고 있다>를 읽고 감명 받아 삶과 생명이 창조되는 신비의 세계로 들어갔다. 가시적 생명체인 식물과 나무에 대한 ‘영혼의 나무-땅이 하늘에게’를 주제로 한 <꿈꾸는 씨앗>,<꿈꾸는 나무>연작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한 생명의 창조와 반복을 향한 경이로운 감흥을 나타내고 있다. 2014년 들어 최 작가는 본래 시도하려던 ‘아사달’을 주제로 아침과 역사의 출발, 한반도 첫 개국신화이자 민족지도자인 단군을 소재로 정치와 철학이 융합된 <아사달의 아침 I,II> 연작을 작업하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향한 열망을 채웠다. 2015년은 최 작가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하이브리드적 시도가 시작된 해이다.

도형과 수식을 기반으로, 또한 사상적으로는 작가 당사자의 신앙생활로 얻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탐구하여, 그리스도의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라는 잠언과 윤회에 대한 천부경의 소재를 각각 따서 100을 의미하는 ‘온’, 그리고 통합, 성속, 소통, 화(和)의 주제를 다룬 <대화>의 5개 연작을 시작한 것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암호를 찾고자 많은 조사와 자료를 검토한 최 작가는 무시무종(無始無終: 끝도 시작도 없음)이라는 원상의 영원한 윤회와 천부경에서 그리스도의 ‘알파와 오메가’가 의미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함께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최 작가는 우주만물의 보편적 암호이자 공식 중 하나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숙명적으로 종속되는 ‘숫자’에 다다랐다. 최 작가는 원래 생각한 천지인과 천부경 대신 숫자라는 난해한 주제를 선택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상징을 투사하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맥을 잇고, 소재를 다변화하는 새롭고 즐거운 고민에 들어갔다며 밝게 웃어보였다. 생명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있는 1에서 9, 혹은 1에서 10이라는 개념의 형태, 이론적으로 정형화된 숫자의 세계를 조형화함에 있어서, 시간을 시각화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흥미로운 과제가 이번에는 어떤 방향으로 드러날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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