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끝으로 죽잎의 기운을 치고 달빛의 뜻을 은은히 뿌린 문인화
붓 끝으로 죽잎의 기운을 치고 달빛의 뜻을 은은히 뿌린 문인화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09.2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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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팔법으로 나부끼는 죽잎에 액션페인팅으로 문인화의 낙관을 찍다”
문인화가 정연 이혜정 화가/진천 사군자연구소 대표
문인화가 정연 이혜정 화가/진천 사군자연구소 대표

죽농서화대전, 신라미술대전, 대한민국솔거미술대전 문인화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문인화가, 정연 이혜정 화가는 계명대학교 대학원논문 ‘문인화의 개념에 대한 고찰’로 말하듯 수묵필법의 일가견을 이루고 생생한 운필로 사군자의 도리를 나타내 왔다. 7세기 당나라 시대의 군자들이 식물에 군자의 덕을 빗댄 시서화를 토대로, 17세기 명나라의 진계유가 보여준 매난국죽의 절개와 인품을 정통의 일필휘지로 펼쳐 온 이 화가는, 지난 8월 40점을 소개한 초대전에서 시구를 표현하던 영자필법으로 잎들이 나부끼게 하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서양유화기법인 콜라주를 뿌리고 에폭시를 덧칠한 이 화가의 새로운 초심은, 문인화에 컨템포러리회화의 형식을 빌린 월죽도의 문학적인 표현과 곱게 간 먹의 짙은 향이 어우러져 잔잔한 감흥을 남긴다. 

문인화의 기운생동에도 서양의 미필적 역동성과 통하는 바가 있음을

사군자의 덕을 이해하면 매난국죽의 절제미도 잘 그린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후한의 채옹이 고안한 서예운필8법의 대명사인 영자팔법(永字八法)에 따르면, ‘영(永)’을 잘 쓰면 한자의 획과 운필의 필사에 통달한다고 전해진다. 줄기로부터 나부끼는 잎의 ‘서오락, 서오락’ 소리를 화선지에 옮길 만큼 문인화의 ‘소리’와 매난국죽 표현으로 유명한 정연 이혜정 화가는, 오래도록 문인화의 시구 한 자락을 지탱하던 영자팔법으로 휘영청 뜬 달빛 아래 세차게 나부끼는 죽잎의 선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2년 전부터 문인화의 매난국죽을 팝아트로 재해석하겠다는 그의 공언은, 8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사)한국서예협회전이자 인사동 한국미술관 3층전관 <제7기 대한민국청년서예전>의 초대전에서 봉인을 풀었다. 오랜 고전운필로 현대적 기법을 도입한다는 것은 뜻이 붓보다 우선되는 자신감을 전제한 것으로, 이 화가는 의도성을 배제한 뒤 외부간섭과 의식에 숨겨진 초현실의 이미지를 진보적 수단으로 표현한 ‘오토마티즘 콜라주’를 새로운 기법으로 도입했다. 그리고 여백 위에 사군자를 올리는 대신, 시화일치를 위해 달과 별, 구름과 흩날리는 눈발 위에 ‘영’의 선과 획으로 난과 죽의 심성을 수묵으로 쳐올렸다. 

여기까지는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처럼 일필로 사군자의 고결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형세를 만든 것 같지만, 전통 위에 현대를 도입하고자 서넛씩 군집된 해서의 운필을 한 뭉치의 죽잎으로 묘사해 촘촘하게 나부끼는 이번 <청풍만죽림>, <죽창금야월화명>에서는 황금빛 혹은 주홍빛으로 물들인 여백이 눈에 들어온다. 이 화가는 문인화의 일필휘지와 서양유화기법인 콜라주로 수묵화의 어둠을 밝고 환한 채색으로 보여주고자 했으며, 보이지 않는 바람의 영롱한 소리와 보이는 대나무의 묵묵하지만 부러짐을 모르는 곧은 절개를 은유했다. 그리고 에폭시를 화선지 위에 발라 먹으로 섬세하게 친 그림 위에 물감을 뿌리는 기법은, 미필적 역동성의 서양 컨템포러리회화인 잭슨 플록 식의 액션 페인팅과 문인화의 기운생동 간에도 통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준다. 

영자팔법에 색(色)을 더해 사군자 주위 달빛과 바람 소리를 들려주다

선(線)으로는 조선말기 남종문인화의 사군자를 따르면서, 대죽표현에 적합한 영(永)의 연마된 필법으로 가지를 채워 동양화와 구분되는 ‘화제(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바를 넣어 문인화를 완성하는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준 이 화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여백의 미 또한 서오락거리는 대죽의 분위기에 맞게 역동적 색감으로 담을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순발력이 생명인 액션페인팅과, 수십 년의 숙고와 필법단련을 단시간에 펼쳐 보이는 문인화는 성향이 달라도 임화(臨畫)로는 복제될 수 없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파격 이전에 문인화의 정신을 추구하는 이 화가는, 중국의 곽희가 말한 “시는 형상이 없는 그림, 그림은 형상이 있는 시”에 어울리게 여전히 문학과 회화가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문인화의 순리를 지향한다. 시는 넘쳐나 글씨처럼 의미를 갖고, 글씨는 변해서 그림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그가 보여주는 파격의 진정한 의미인 셈이다. 

운필이 곁가지를 내서 풍경 위에 일필로 나부끼는 잎이 된, 동서양의 회화요소가 어우러진 이 결합은 이질감이 거의 없다. 시와 그림이 원래 합일된 법칙이라는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은, 표현 방식이 바뀐들 화선지 위에서라면 여전히 통용되는 중이다. 이 화가의 달빛은 북쪽의 겨울을 상징하는 대나무에, 여름 난초와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다. 잎의 형세로 바람의 방향까지 표현한 이 화가 식의 문인화인 월죽도는 이제 은은한 등불을 켜듯, 사군자 주변의 달과 별, 구름과 눈발에도 색이 상징하는 음양과 맑은 서정성의 의미를 담기 시작한 것이다. 문인화에 마음을 담은 선비들처럼, 이 화가는 지금까지 병풍과 부채, 화선지에 기운생동한 매난국죽의 기개를 담아 왔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2-3m의 종이를 깔고 일필휘지와 액션페인팅으로 월죽도를 치며 채색했다고 한다. 문인화의 특성 상 한 달이면 전시장을 모두 채울 수 있지만, 문인화의 정수는 본질과 진정성에 있다. 그래서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현대에 와서도 이 화가처럼 매일 깊이 숙고하며 아침 자리끼보다 문방서우를 먼저 잡는 노고가 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본래 단체전에 가까웠던 이번 인사동 전시가 이 화가의 초대전처럼 된 것도, 채옹에게 운필8법의 상징으로 발탁된 이래 문인화에 적힌 수 억 개 단위의 글자로 살아오다 처음으로 사군자의 일부가 된 ‘영(永)’이라는 글자 획의 운명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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