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적 어해도에서 3D프린팅 믹스미디어로 새로워진 기운생동
민화적 어해도에서 3D프린팅 믹스미디어로 새로워진 기운생동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08.04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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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덧칠에서 출력물 조합·도색으로, 힘과 기복의 의미도 획기적 전환‘
서양화가 김양훈 작가
서양화가 김양훈 작가

서양회화를 전공한 화가, 김양훈 작가는 ‘황금잉어’ 전문화가로 불린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기복신앙을 물들인 화려한 오방색으로 마음에 긍정적인 힘과 에너지를 불러일으켜, 복과 생동하는 행운을 전하겠다는 그의 메시지를 담고 화폭 한가운데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는 잉어의 모습은 몹시도 강렬했던 것이다. 송나라 화백들로부터 조선시대로 전승된 18세기 우리 민화 속 잉어는, 뚜렷한 장식효과로 풍어를 기원했던 우키요에 족자의 토실한 물고기와 달리 건강과 운을 상징한다. 김 작가는 화려한 비단잉어는 물론 비늘이 밝고 머리는 검어 중국 황실에서도 귀하게 본다는 황금잉어의 묘사에 능해, 실물을 닮되 현실에는 없는 수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요동치는 잉어의 다양한 몸짓을 그려 왔다. 

초기에는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어해도인 2014년도 작품처럼 반구상적 배경 묘사 속에서 눈과 비늘, 광택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지만, 사진보다 상상 속의 형상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개성이 용솟음치게 마련이다. 어안(魚眼)이 캐릭터나 사람의 눈알을 닮아가거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민화 그대로의 의인화가 된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김 작가의 작품소재에는 꽃도 잎도 없는 건조한 고목도 있었다고 한다. 홍익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서양회화를 선택했지만, 고목의 가지를 그리다 보니 동양화기법과 꽃나무, 매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강직하고 절개를 지닌 사군자를, 또 학과 거북처럼 장수하는 동물을 그리다 십장생을 발견한 그는 자신이 원하던 소재가 민화의 색감과 무늬였음을 알게 된다. 민화를 계기로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하고자 화조도, 초충도, 대죽화, 솔송화같은 자연소재에서 현생의 부귀영화를 그리게 된 김 작가는 매력적인 움직임 덕분에 보는 것만으로도 손힘이 절로 들어가는 역동성으로 기를 불어넣는 비늘 달린 물고기의 도약을 5년 이상 그렸다. 그리고 그는 작년 여름부터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잉어를 캔버스 수면 깊은 곳에 던져 넣고 새로운 소재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3D프린터라는 차세대 거푸집으로 더 새로운 표현 준비해

김 작가는 판화 롤러를 내려놓고 붓을 들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붓질을 반복해 만든 양감과 평면 위 물감 채색에 회의감이 들면서 탈피를 할 욕구가 생겼다고 한다. 강물을 1천 번 거슬러 용이 된다는 잉어의 전설처럼, 사실상 김 작가의 잉어가 노닐던 물도 일필 수묵이 아니라 묽게 한 유화물감을 최대 70회까지 덧입히고 말리기를 반복해 얻은 색에서 나왔다. 그리고 진하게 덧입혀 화려함의 격이 다른 오방색의 생동감은, 그 사이의 간색까지도 생기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 물고기는 단순한 배경의 오브제가 아니라 자아를 이끄는 방향타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도록 푸른 바닷물느낌으로 나타낸 묵직한 청색, 그리고 노랑, 빨강, 검정, 흰색에 들인 노력에 깨달음을 받아, 그는 앞으로 색칠에 품을 들이는 것보다는 기법을 달리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진정한 장수는 손에 쥐는 모든 것을 명검으로 만들 듯, 자신의 페르소나격인 잉어처럼 그는 붓을 놓고 거침없이 다른 영역으로 뛰어든다. 

2000년 대 판화로 전북미술대전 대상을 받고, 그림 작업과 강의 속에서 순수회화작가로는 드물게 타블렛과 디지털미디어를 이용한 3D프로그래밍과 그래픽아트까지 공부해 둔 덕분이었다. 또 어떤 소재로 만들지를 고민하며 술을 마시러 갔다가 눈에 띈 이쑤시개 뭉치에 호기심이 생겨, 그는 단순 채색보다는 3D프린터로 출력한 작은 오브제들을 타일처럼 붙이거나, 비늘 표현에서도 마치 일벌이 벌집틀에 꿀을 채워 넣듯 레진 물감을 부어 새로운 패턴을 만들기도 했다. 시험 삼아 출력해본 이 오브제들이 마음에 들어, 김 작가는 새로운 3D장비를 마련해 속이 빈 수백 개의 비즈를 밑판에 채워 물감을 붓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회화와 조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 시도들에 대해, 김 작가는 여느 때보다도 한 곳에 정체되지 않는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기 좋아졌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개인전은 미뤘지만, 대신 창작에 몰두하며 완성품들을 그룹전에서 조금씩 선보일 것이라는 김 작가는 새로운 작품 유형에 대한 의견도 내비친다. 창작의 산실에서 대략 80%정도 진행된 김 작가의 구상에 따르면, 잉어의 눈, 지느러미, 비늘 등 세부묘사로 된 추상 부조나 믹스미디어 회화일 수도, 오브제 콜라주일 수도, 혹은 새로운 소재와 또 다른 생명의 형태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현실에 있음직한 요소로 현실에 없는 것을 불러온다는 것, 이것이 바로 김 작가가 추구하는 파도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창작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고로 형태가 변하고 평면 캔버스의 유화 붓에 찍은 행로를 벗어났을 뿐, 우리는 새로운 물살을 만나 계속되는 작가의 창작을 지켜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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