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의 고집과 철학이 만든 한국 현대미술의 여명(黎明)
위대한 예술가의 고집과 철학이 만든 한국 현대미술의 여명(黎明)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02.11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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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一浪) 이종상 화백/동양화가/대한민국예술원 회원/한국벽화연구소장/철학박사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동양화가/대한민국예술원 회원/한국벽화연구소장/철학박사

서울대 미대 출신이자 24세의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를 겸했으며, 프랑스 문부성이 초청한 루브르미술관의 첫 생존작가로 3회 연장전을 기록했다. 미대교수로서는 유일하게 서울대학교박물관장으로 재임 중 국내 최초의 대학미술관을 건립한 후 초대미술관장을 겸임하는 등, 최초, 유일의 역사적 업적을 많이 지닌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과 무관한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스승의 스승인 원로화백들 속에 손자벌인 최연소 화폐영정화가가 되어 5천원 권의 율곡 이이선생을 그리고, 35년 후 다시 최고액권인 5만 원 권의 신사임당을 그려 모자분의 화폐영정을 그린 세계 초유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일랑 화백은 미술전문학위가 아닌, 현역화가 최초의 인문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화가로서, 우리 민족미술의 자생성을 통한 근원형상, 곧 원형상(源形象)을 탐구하면서 우리만의 정통화풍과 건축조형과의 조화, 벽화의 재료기법과 한민족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적 문화활동을 전개해 왔다. 
일지기 60년대 고구려벽화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최초로 “문화영토론”을 주창,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으로 수 십 년 후에 일어날 동북공정에 대비했고, 70년대에는 독도문화심기운동으로 지난달 아랍에미리트 대한미국예술원전 개막식장에서 현장 퍼포먼스로 독도일출을 지두화(指頭畵)로 그려 많은 외빈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적 문화자생성은 유목, 수렵, 농경과 해양의 다문화성에서 유래되어 왔음을 알리며, 창작활동을 통해 남북문화 동질성 회복에 앞장서 평화통일의 마중물이 되고자 노력해 왔고 또 계속 될 것이다. 
일랑 선생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실천하는 예술가로서 은관문화훈장 서훈과 건국포장 전수의 국가유공자로서 평생토록 자기의 전공 안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주어진 소임을 실천함으로서 후학들로부터 존경받는 원로화가이다. 

한국미술의 정통기법과 조형철학을 계승해 표준영정의 오류를 수정, 민족화의 긍지를 살리다

한국 화단의 상징적인 이름, 일랑 이종상 선생은 5백여 회의 초대전 및 단체전, 해외전시와 30여 회의 개인전에서 고구려 벽화의 현대화와 독도진경화로 국토를 수호해 온 현대미술의 존경받는 원로 거장이다. 
일랑 선생은 1998년 프랑스 문부성 TFAA 초대를 받아 생존작가 최초로 루브르미술관 까르젤에서 병인양요의 진실을 알리는 설치벽화 “원형상-마리산”(6 x 72m)작품 개막식에서 외규장각 조선왕조실록과 직지요체 등, 문화재 반환을 최초로 공개 언급한 작가였다. 
1988년 시행된 우리나라 현행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고 시작 된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미술대학 2학년 재학생이던 이종상 학생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 투쟁을 위해 고향의 노모에게 유서를 남기고 분연히 민주화의 데모 행열에 앞장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유탄을 맞고 수배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하야 망명으로 복학한 직후, 자기 전공에 전념하여 재학 중에 국전 특선과 제1회 신인예술상 최고특상과 국전 특선 내각수반상과 대학 종업년도에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끝으로 23세의 국전사상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면서 기성작가로서 화려한 화단 등단이 시작 된다. 이종상 선생은 바로 모교에 출강을 하면서 많은 논문발표와 천경자, 김기창 박래현 등 원로 분들과 한국 최초의 화문집 ‘화실의 창을 열고’와 ‘솔바람 먹내음’ 등 화문집을 발행하면서 31세에 최연소 국전초대작가로 심사위원 반열에 올라 선배, 스승 벌의 출품작을 심사하게 된다.
이렇게 왕성한 화단활동을 하면서도 미술협회나 예총 등 화단정치에는 전혀 무관심 하였으며 수십년 후에 다가올 중국의 동북공저정(東北工程)을 예측,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과 미구에 다가올 일본 제국주의 잔재적 망언을 예측하고 1977년 최초의 독도화가로 ‘독도문화심기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화가로서는 흔치 않은 통섭의 인문계 박사학위 소지자로, 서울대학교박물관장이 되어 ‘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전과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만들어 칸느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시발점인 ‘오원 장승업전’을 기획했고, 최초의 ‘독도진경기획전’, 최초 대학미술관건립을 실현했다. 이처럼 자기 전공이 무엇이던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국가와 민족에 공헌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노력한 결과 은관문화훈장의 수훈자이면서, 2003년 제180호 대한민국건국포장 전수로 헌법에 명시된 국가사회공헌 상훈법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자격을 갖춘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일랑 이종상 선생은 또한 세계에서 유례없는 우리나라 최고액권 화폐의 주인공인 신사임당과 5천원 권의 율곡 이이 선생 두 모자분의 영정을 그리고 그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는 유일한 생존 화폐영정작가이기도 하며, 독도 애호가들의 자랑이기도 한 일랑 선생은 팔순을 넘긴 현재도 한국 문화예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일랑 선생은 순종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 선생께 한국 유일의 정통영정만을 사숙한 제자로 화폐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서울대 미대교수로 월전 장우성, 남정 박노수, 산정 서세옥 교수의 직계 제자로 이제 산정 교수님만 생존해 계시고 모두 고인으로 미술사의 인물이 되었다. 
이 로서 민족의 정통영정화기법인 육리문, 배채기법 연구에 50년이 넘는 세월을 바친 족적을 바탕으로 전통미술기법계승에 관한 세간의 오해에 쐐기를 박는 활동을 보여 왔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가인 이당 선생을 와룡동 댁으로 직접 찾아가 정통 어진점묘법으로 전 세계 우리에게만 전해오는 육리배채(肉理北彩)법을 전수받으며, 선생이 생전에 표준영정제도가 없었을 때 고증 없이 그렸기에 이루지 못한 현 표준영정의 오류 수정에 대한 스승의 생시 바람을 들어서 기억했었다.
2009년에 최고액권의 주인공, 신사임당을 그리게 되어 이 같은 점을 바로 잡기 위해 학계권위자들로 고증 위원회를 구성한 후 고증에 의한 새로운 화폐영정을 실현한 일랑 선생은 수많은 표준영정에 대한 보도오류를 2019년 10월자로 바로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 그려진 한국은행 소장본의 신사임당 화폐영정은 현재 국가표준영정을 참고로 하여 해방 당시 7세로 친일미술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랑 선생이 철저한 고증에 의해 새로 제작한 작품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일랑 선생은 당시 한국은행발권국장과 협의 하에 새로 고증된 자료를 추가 반영해 1965년 고증 없이 제작되어 오죽헌에 안치되었다가 한참 후에 표준영정이 된 오죽헌 본은 16세기 생존시기의 신사임당이 아닌 19세기 이후의 복식과 머리장식 등으로 잘못 제작된 작품임을 알아야한다.
일랑 선생은 지역의 대부호집안 신씨 가문의 딸로, 지식인이자 신여성으로서 예술 활동을 한 신사임당이기에, 5개월에 걸친 고증회의와 시연으로 가장 활발히 창작을 한 연령대의 외모를 반영하고자 노쇠해 보이는 두발형태와 화장법을 고증에 맞게 수정했고 정면상을 칠분측면화로 바꾼 새로운 한국은행본 신작임을 알아야한다고 했다. 

파리 루브르미술관이 영구전시 제의한 ‘한지 배명조명법’ 화가, ‘문화의병단’ 자주성 세워

1961년 22세로 국전 동양화부 최고특상 수상, 23세 최연소 국전추천작가로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 일랑 선생은 1975년 미국 텍사스대 제1회 초대개인전을 열었으며, 1997년 프랑스 문부성의 초청으로 5개월에 걸쳐 루브르미술관에 한국인 최초, 첫 3회 연장전을 기록한 한지 배면조명법에 따른 ‘병인양요’ 주제의 설치개인전은 전 세계 127만 명이 관람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일랑 선생은 혜화성당과 절두산성전을 설계한 이희태 교수로부터 60년대초 재학중 건축학을 수강한 이래 한국의 3대 2 황금비율의 결이 담긴 유결한지의 창호문화가 방한방풍  외에도 광섬유성 채광을 활용한 예술·건축적 지혜가 집대성된 내외소통의 영상 창호문화를 높이 사며, 세계 유일의 장판문화를 지켜온 한민족의 지혜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 같은 장지문화가 있었기에 구텐버르크 보다 73년이나 앞선 금속활자본 직지(直指心諦要節)가 1377년 고려 우왕 때 이미 만들어질 수가 있었고, 한중일의 같은 동양화권 안에서도 겹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장지에 스미고 번지며 쌓이는 우리만의 채색화 장지기법이 있어 일랑 선생이 봉헌한 한국 최초의 신리순교미술관에 그 많은 작품들이 모두 정통장지기법과 육리배채기법만으로 그려진 작품이기에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일지기 문화영토론을 주창한 그가 ‘현대 진경론’을 실천하며 근원형상에 따른 ‘원형상’이라는 우리 미술의 근원적 철학을 주장하며 5천 년간 갈고 다듬어진 한국문화의 자생적 근원을 파악하고자, 40여 년 간 만주의 집안(集安)과 북한 땅의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작가로 모함 받아 남영분실에 불려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신념을 꺾지 않았다. 
1960년대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에 이어, 1999년 아태평화위원장의 초청으로 3차례 북한고분유적답사의 꿈을 이룬 일랑 선생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하고자 ‘자생문화론’, ‘문화영토론’을 주창자로서 고구려고분군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등재를 막는 중국을 비판하는 <고구려 벽화 앞에 부끄럽다>라는 칼럼을 게재하고, 최고의 금속활자인 직지를 탄생시킨 우리의 장섬유‘유결한지’의 자존심을 걸고 독도를 지키는 전국 60인의 ‘문화의병단’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빛과 공간감을 매개로 병인양요의 진실을 알린 작품의 영구소장을 요청하자, 이에 대응해 외규장각 조선의궤도서와 직지의 반환을 조건으로 제시한 나라사랑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의 거장, 일랑 이종상 선생은 서울대학교박물관장으로 친분이 두터운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를 불러다 설계한 국내 최초의 대학미술관을 건립하고 초대 관장을 겸임하면서 박물관에서 ‘한강유역의 고구려유적전’, ‘독도진경전’, ‘발해전’, ‘오원 장승업전’과 같은 기획전을 연이어 개최하기도 했다. 

남북 첫 번째로 독도작품 공동전시 이루고 문학, 철학, 종교성화를 아우르는 예술행적 기록해

일랑 선생의 독도문화심기운동은 국내 첫 독도진경여행을 통한 1977년 <이종상 진경전>을 개최해 그간 30여회에 걸친 독도입도와 600여 점이 넘는 독도진경화와 함께 원형상-독도 추상화를 제작하고, 울릉도 독도박물관과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부설 독도체험관에 ‘최초의 독도화가’의 자료로 다른 독도역사 자료와 함께 전시되어 많은 관객 중에 특히 일본 다께시마를 그리려했던 일본작가들이 확인차 많이 와보고 포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해와 독도를 문화로 지키려는 외교관 출신의 라메르에릴 대표 이함준 박사가 그단체의 고문으로 있는 일랑 선생과 제자들의 협조로 작년에 고려대학박물관에서 한국최초의 남북작가독도전에 북한의 만수대창작사 선우영 인민작가와 독도작품이 함깨 전시되어 남북 독도공동전시가 이루어져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으로서 독도 ‘DOKDO’라는 우리영토를 문화로 온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랑 선생은 <한국민족문화논총> 33인 우수논문에 선정된 <재료기법으로 본 고구려벽화>, <쌍영총 벽화제작도>를 발표하고, 동국대 이기영 교수의 도움으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찬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원효대사가 우리식으로 해석한 철학을 연구하면서 인연이 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동서비교미학을, 박사과정에서 동양철학을 10년간 공부하여 현역화가 최초로 인문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주변에서 몰랐단다. 문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일랑 선생은 (사)문학의집이 선정한 ‘가장 문학적인 화가상’을 수상하며 <화실의 창을 열고>, <솔바람 먹내음>등의 수필을 쓰기도 했고 <한국의 예술혼 높이 날다>가 윤학 변호사와의 대담집으로  희물결출판사에서 발행돼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김남조 시인과 김형영 시인 등이 일랑의 화가로서의 삶을 시를 통해 발표한 귀한 작품들도 있다. 
또한 문학과 역사, 예술이 조화된 삶을 반영하듯 공중니(孔仲尼)의 후소론(後素論)이라는 전인적 회화윤리학으로 시서화 삼절의 유불교, 선비문화의 조화를 설명한 일랑 선생은, 고려 불화를 연구해 서양의 쉐라 점묘법에 앞선 인물묘사기법인 육리문(肉理文), 화폐영정에도 활용한 배채법(北彩法)과 같이 난도 높고 깊은 철학이 있는 전통화법의 자생성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그리고 본업인 화백으로서 고분벽화와 독도화, 현대진경화와 원형상작품 외 현행 화폐영정화가로 명성을 얻은 일랑 선생은 기타 영정과 성화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원효대사 영정과 장보고, 우륵, 고산 선생 영정 등이 일랑 선생의 작품이며, 천주교에 귀의한 이후로 병인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충남 신리성지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순교미술관에 장지기법을 담은 순교성화 봉헌으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루었다. 
성 다블뤼 주교,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 성 손자선 토마스 영정성화 5점과 1천 호 크기의 순교기록화 13점을 봉헌하며 한국순교역사를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이처럼 일랑 선생이 다양한 족적의 스펙트럼을 통해 보여준 행보들은 이 시대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예술가의 자세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철학,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귀감이 되는 거장중의 거장의 삶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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