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담벼락 위 담쟁이 줄기, 그 꿋꿋한 삶에서 돋은 잎사귀의 멋진 꿈을 끌어안다
메마른 담벼락 위 담쟁이 줄기, 그 꿋꿋한 삶에서 돋은 잎사귀의 멋진 꿈을 끌어안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20.02.11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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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아름다운 잎은 숨겨졌으되 진실한 인생의 열정 머금은 담쟁이 가지와 넝쿨에 어울려”
서양화가 이금주 작가
서양화가 이금주 작가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 화가 존시는 시든 잎 하나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고, 비바람에 떨어진 그 잎을 꼭 닮은 잎 그림 덕분에 죽음을 버리고 삶의 의지를 얻는다. 자기연민을 극복하게 만든 아름답고 숭고한 담벼락 위의 잎새가 보여준 인간애는 소설 속의 이야기에 멈추지 않고, 담벼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라는 얼굴이 되어 인간관계와 삶, 세상의 수많은 사연들을 은유하며 캔버스라는 담벼락 위에 만개하듯 피어났다. 담쟁이덩굴과 잎으로 ‘암시하는 오브제’, 그리고 ‘담쟁이 숨은그림’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양화가 이금주 작가의 담쟁이 그림 또한 혹독하고 모진 겨울을 견뎌낸 담쟁이덩굴 가지와, 이듬해 그 가지에서 피어난 꽃보다 아름다운 적록빛깔 잎들의 결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담쟁이에게 벽은 메마른 역경을 딛고 뻗어나가 푸른 잎새 키우는 희망의 터전

전남대에서 서양화를, 목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서양화가 이금주 작가는 담쟁이를 소재로 화사한 색감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1월 8일부터 14일까지 경인미술관 제5전시장에서 개최된, 버박코리아 초대전이기도 한 ‘2020 Hug(끌어안다)-Find a Hidden Picture in Ivy’전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담쟁이 이미지에 사람을 위로하고 교감하는 포옹의 주제를 담았다. 한때 키웠던 원대한 꿈을 생활 속에 묻어야 했던 여느 여성들처럼, 이 작가도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한동안 화구들과 만남이 뜸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들어 버리지 못했던 아이들의 천기저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황토로 물들이고 조각을 내 캔버스 위에 콜라주하며 이 땅을 닮은 <어머니>의 초상을 이어붙이고, 한반도의 힘찬 기상을 닮은 수호동물 황호의 형상을 만든 <호랑이>등은 이 작가의 군집과 숨은그림의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푸르른 청춘을 지나 불혹의 무채색 일상으로 진입하는 동안, 이 작가는 흙도 물도 없이 마른 담벼락을 억세게 기어올라 혹한을 이기고 살아남은 담쟁이덩굴의 모진 삶에 공감하고 자신의 인생을 이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로는 황폐해 보이는 담쟁이 줄기의 흔적에서 생각 외로 유쾌한 생명력과 재미있는 성장과정을 읽게 된 이 작가는 그 열정적인 삶으로부터 푸른 잎새를 싹틔우는 희망과 꿈을 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담쟁이 스토리텔링은 가지를 사람과 동물의 형상으로, 그 안의 털과 머리칼을 잎으로 묘사하는 숨은그림이 되어, <햇살 눈부신 날에>처럼 여유까지 갖추게 되었다. <주홍나비>, <푸른나비>는 각각 삶의 굴레인 주홍글씨와 젊음의 푸른 꿈을 상징한다. 또한 측면 묘사를 좋아하는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반영하는 <여인>으로부터 차츰 인물들 간의 친밀한 관계성을 드러내는 <Hug> 시리즈로 나아가, 옆얼굴과 뒷머리들은 하나에서 둘로 늘어 서로 마주보거나 포옹하며 돈독한 교감을 보여준다.

담쟁이의 희망을 나누는 조각그림처럼, 의미 있는 나눔 시작하며 숨은그림 작업 이어갈 것

본래 이 작가가 유화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끈질기게 벽에 붙어 프랙탈 혹은 불규칙 형상으로 담벼락에 그리는 넝쿨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메마른 가지일 때는 벽의 조연이었다가, 가지에서 푸른 잎이 서서히 만개해 벽을 뒤덮고 주연으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벽을 끌어안으며 잎이 돋아난 줄기 넝쿨에서, 지나간 과거로부터 희망을 찾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담쟁이의 모진 삶에 공감하며 활기찬 열정으로 가득한 담쟁이들 사이에서 쉬고, 그 억센 손길을 끌어안으며 위로받는 ‘허그(끌어안다)’는 화폭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담쟁이의 생육에 따라 점점 드러나는 숨은그림찾기이기도 하다. 시든 잎과 마른 가지가 힘겨운 사람의 발걸음형상을 한 <고난을 딛고>, 오색찬란한 잎들의 빛깔로 한국과 북한,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포옹하는 화해무드를 표현한 <20180427 우리가 만난 기적II>, <북미정상회담>에서 이 작가는 개인이 바라보는 밝은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개인전 ‘작은 행복 그리기’ 이후로 작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연민과 공감을 표현하기도 한 이 작가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소천하신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그리고 어머니의 입장에서 세월호 학생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또한 6피스로 이어져 전시회에서 승천하는 말의 형상을 덩굴과 화려한 잎으로 표현한 <천마>는 가짓수가 많아 그리기 어려운 잎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그림에 피를 돌게 하고 뼈와 살을 붙이는 이 작가의 스타일을 반영해 눈길을 끌었다. 덕분에 갤러리의 감상자들은 그림을 관찰하고, 이 작가가 숨겨둔 그림 속의 메시지와 은유된 대상을 흥미롭게 읽으며 때로는 작가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숨은그림을 찾아내 알려줄 정도라고 한다. 이렇듯 메마르고 흉물스러우며, 때로는 음산한 느낌을 주는 담쟁이덩굴에서 직설적인 느낌보다는 인내를 통해 거듭난 잎의 화려한 이미지에 주목해 달라는 이 작가는 <마지막 잎새>의 노신사 화가가 보여준 숭고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 한편 올 가을 전남대병원 초대전 작가로 결정된 이 작가는, 작가로서 받은 지원과 사랑을 나뭇잎처럼 떼어갈 수 있는 100개의 조각그림으로 표현할 것이며 환자는 희망을 소장하고 여기서 생기는 수익을 기부로 돌려주는 작업도 구상 중이라고 한다. 한때 미술학원과 3D작업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뜻이 있어 붓을 적셔 채색하는 화가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 작가는 ‘작은 잎 하나라도 정성들여 칠했고, 생을 다하는 날까지 캔버스 앞에 머물렀으며 붓을 놓지 않은 작가’로 기억되어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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