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선생의 24대 정래정 종손, 한·중 오가며 포은 선생의 사행역사 발굴하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24대 정래정 종손, 한·중 오가며 포은 선생의 사행역사 발굴하다
  • 정재헌 기자
  • 승인 2019.10.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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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투쟁가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소속 부친 고철 정철수 선생의 행적 출간에 이어, 지조와 충절의 상징이자 한중사행 뱃길 개척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역사적 현장을 봉헌하다”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정암통상(주) 대표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정암통상(주) 대표

1950년대 중반에서 1976년까지 중국의 반우파투쟁·문화혁명으로 인해 지주 가문으로 분류된 고철 선생은 아들에게 원래의 고향은 한국임을 알리고, 중국 인명사전인 <사해>에 오른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수록된 페이지를 보여주며 원래의 성인 정(鄭)씨와 900년 전통 형양공파(滎陽公派)의 대종가 종손이자 포은 정몽주 선생 24대 종손이라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이후 사업가가 되어 28세에 부친과 귀국한 정래정 종손은 지금까지 명(明)황제 주원장(朱元璋)의 뱃길 윤허를 받아 육로 및 뱃길로 6회에 걸친 한중사행을 개척하고, 명나라와 교류하며 시문을 남긴 포은 선생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굴하고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부친 고철(古哲) 정철수(鄭哲洙) 선생의 업적을 출간하며 포은공파 직계 종손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하는 2019년, 오래 전 한중교류와 바다무역길 개척에 기여한 바 있는 포은 선생의 사행지를 직접 체험하며 그동안 한국과 중국에 수많은 포은 선생의 동상을 봉헌해 오고 있는 정래정 종손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우국충정이라는 공통분모로 바다를 건너 한중 교류에 기여한 포은 선생과 포은공파 종손

고려 말기 충심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역사인물인 포은 정몽주 선생은 포은공파 직계손이라는 이유로 설곡(雪谷) 정보(鄭保)가 세조로부터 사형을 면제받고, 증손 정윤정(鄭允貞)이 성종으로부터 감형을 받은 이야기가 실록에 전해질 만큼 귀하게 대우받아 왔다. 1406년부터 개성에서 천묘된 포은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기 용인시에서는 45번 국도에 포은대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지구에서는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가 개관하였으며 지금도 포은학회(圃隱學會)와 수많은 성리학자들은 포은의 충절과 성리학, 공자의 정명사상과 주자가례 배포에 기여한 업적을 기린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포은 선생의 남다른 업적을 발굴하고 있는 그의 후손 영일 정씨 포은공파 24대 정래정 종손은 종중정관에 따른 포은유덕 사업 분야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포은 선생에 관해 독보적인 성취를 보이고 있다. 정래정 종손은 부친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종중을 빛낸 조상들의 역사적 행적을 알리고자, 포은 선생과 부친 정철수 선생의 업적을 조사하고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봉헌하며 기록하는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종택 준공을 10여 년에 걸쳐 준비한 끝에 지난 2017년 준공식을 성황리에 마치고, 그 외에도 포은 선생의 명나라 사행길 발자취를 발굴하고 한중 양국에서 기념하는 두 가지 사업을 이뤄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 태항산(太行山) 및 길림(吉林) 지구에서 항일투쟁과 교육 사업에 헌신한 부친 정철수 선생이 ‘고철’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업적을 철저히 고증하고 주석을 붙여, 보훈처에 접수해 201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공훈표창을 수여받도록 했다. 또한 그는 부친 정철수 선생의 저서 <나의 청춘(한 학도병이 걸어온 길)과 자료집을 2013년 탈고하고 이듬해 재출간했다.

조선의용군 애국지사 부친 고철 정철수 선생으로부터 6백여 년 전 포은 선생의 행적 듣다

포은공파 23대손 정철수 선생은 1942년 말, 학도병 징집을 당하자 목숨을 걸고 산동성 제남을 탈출하여 동료와 함께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조선독립연맹 소속으로 중국 팔로군과 연대해 만주괴뢰정부 파병 일본군과 싸웠으며,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고학력 학도병으로서 환영받고 팔로군 상사 고용을 따라 고(高)씨로 개명해 신분을 숨기고 의용부대원 고철로 활동한다. 그리고 험준한 태항산의 태항분맹에서 활동하며 <조선은 살았다>, <개동이와 예쁜이>, <풍자극 이발소>를 비롯한 한민족의 삶을 다룬 항일극본을 발표했으며, 해방 후 길림성에 자리 잡아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편집부장 시절 <아리랑>, <일일상사>등 우리 생활상이 드러난 희곡도 집필했다.

1949년 4월, 길림시에 제1대 교장을 맡고 조선중학교를 설립, 일어를 병행하는 조선인들을 위해 일어와 한문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함께 가르친 고철 선생은 해방 이후 인척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총살당해 현지 귀국을 미루었지만, 1983년 KBS이산가족방송에서 한국의 가족들이 ‘정철수’를 찾는 것을 알고 이듬해 귀국을 결심하고 1986년 아들 정래정 종손과 영구 귀국했다. 정래정 종손은 1989년 2월 17일 소천하신 부친의 뜻과 종손의 도리를 따르고자, 한국과 중국에 남아 있는 포은 선생의 명나라 사행길 역사기록을 토대로 직접 행로를 탐사, 고증하며 많은 정보를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정래정 종손은 포은 선생의 업적 발굴을 포함한 종손임무 수행, 그리고 부친의 회고록과 유고집 정리, 그가 설립한 한중 무역회사 정암통상(주)의 사업이라는 세 가지 일을 수행하고 있다. 회고록을 고증하고자 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생업으로 택한 데는 명과 일본행 국제사신인 정사로 활약하며 한시를 많이 남긴 포은 선생이 고려 말 한중 육로와 뱃길의 항로를 윤허 받은 기록과도 영향이 있다. 중국과 한국의 첫 수교 시절 고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중국어대사전 집필교열에 참여한 정래정 종손은, 연변대 일본어과교수로 재직하며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며 일본의 문학을 논하고 군국주의를 지적하던 부친의 문학적 재능 또한 사신을 수행하는 기록사인 서장관으로서, 그리고 사신으로 육로 및 뱃길로 중국의 명승지를 거쳐 가며 뛰어난 한시를 다수 저술한 포은 선생의 종손다운 면모였다고 한다.

부친이 일깨워 주신 한국의 혼과 기개, 
삶과 포은 선생의 업적을 역사에 남길 동상 봉헌 시작

정래정 종손은 한국에서 정암벨라까사 분양 등 신사업을 발굴하는 한편, 중국 연태경제기술개발구의 진허(金河)그룹 및 기업 공동합자 금정화공제품 유한공사 협력사 일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오래 전 중국에서 정철수 선생이 일러 준 “충(忠)은 나라를 향한 충성이요, 효(孝)는 부모를 향한 효도, 진(眞)은 속세를 살아감에 진실 됨이라, 마지막 의(義)는 대인관계에서의 원리원칙에 대한 의리일지니. 이러한 정신을 능히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법도”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 포은 선생의 족적을 오래도록 기억한 정철수 선생은 정래정 종손에게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영향을 받은 포은 선생처럼 선악의 옳은 기준을 세우고, 각자의 지위와 명분에 따른 덕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래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정래정 종손은 포은의 중국 6차 사행길 유적을 따라, 중국 인명사전에도 등재된 포은 선생의 동상봉헌 작업에 착수하며 근 20여 년 간 포은 선생 선양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정래정 종손은 곡부(曲阜), 등주(登州), 양주(揚州), 그리고 영파(寧波)에 이르는 사행길에 동상을 봉인하고 있으며 그 중 유명한 중국 곡부시에 위치한 공자연구원(孔子硏究院)에 포은선생 흉상을 2008년 6월 6일 봉인하고 제 1차 한중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2005년 7월 26일 등주항 서남쪽의 한국고선 2척 발굴과 사신 홍사범(洪師範), 서장관 (書狀官) 포은 선생 일행의 최소 4척 이상 되는 사신항이 출항했다는 사료를 밝혀낸 것을 계기로, 2009년 8월 20일에는 중국 산동성 연대 봉래시의 봉래각 등주박물관에 산동지역 언론과 한중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포은 선생의 시판과 흉상을 봉안하였다. 등주는 귀국 중 허산 앞바다 해난사고를 당하고도 명 황제의 고려왕조를 향한 공문전달을 침착하게 수행한 포은 선생이, 교류임무를 기념해 지은 귀향시 <등주과해(登州过海)>를 계기로 잘 알려진 장소이기도 하다. 이는 2012년 5월 17일 봉래각 고선박(古船舶)박물관이 건립되고 중국 영파미술대학 매법채 교수가 조각한 포은 선생 석상을 봉안했다. 

또한 중국 양주시 자매결연을 맺은 경기도 용인시 관계자들과 포은학회 및 포은공파 종인들과 함께 양주대학교에서 포은학회의 제 7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최치원(崔致遠) 선생 동상이 있는 양주 당성유지박물관(唐城遺址博物館)에 포은 선생의 동상을 봉안하기도 했다.
또한 절동해사민속박물관(浙東海事民俗博物館)이라는 중국 8대천궁과 7대회관 중 하나라는 명소에 지난 2019년 7월 24일 포은동상을 기증하는 제막식을 개최하였으며, <고려사 열전>을 인용해 남경사행 당시 허산 앞바다에서 난파해 표류하고 무인암도에서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13일간 연명하다 구조되어, 남경으로 향한 포은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며 한중 양국간의 우호를 증진하자는 축사를 남기기도 했다. 

중국 현지에서 포은 선생의 사행길을 따라 포은선생 영정과 흉상 순회전을 이어가다

한편, 정래정 종손은 1384년 고려의 청시승습표(请谥承袭表)를 받들고 남경에서 그를 기억하는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을 만나 1374년 전통 등주해로 등재 윤허에 감사를 표한 포은 선생을 비롯한 고려 사절단이 작은 도시 등주를 항구도시로 승격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례를 소개한다. 정래정 종손은 그 동안 북경에서 일조, 양주, 영파, 그리고 포은 선생 사행길의 종착지이기도 한 남경에서 관계자들을 만나며 포은 선생이 조난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1차 사행을 비롯해, 명 황제 주원장의 환대를 받으며 입출국 바닷길 조정방안을 건의하고 관철시킨 뒤 바뀐 사행로로 일본 1차례, 명 6차례라는 총 7회 사행길을 완성한 포은 선생의 행보를 되짚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래정 종손은 중국 정부가 진행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해상 실크로드> 홍보 기념 순회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봉헌지를 포함해 산동성 봉래시 등주박물관, 고선박박물관, 복건성 복주시 복주박물관, 장주시 장주박물관, 천주시 천주박물관, 강소성 남경시 남경박물관, 양주시 양주박물관, 광서성 북해시 북해박물관, 광동성 광주시 광주박물관의 순회일정에 포은 선생의 흉상과 영정을 전시하고 바다를 누빈 포은 선생의 호방한 정신을 중국 현지에 널리 알리는 중이다. 

그리고 정래정 종손은 한국에서의 봉안과 제막에도 힘써, 2008년 5월 10일 포항시 포은도선관에 포은 선생의 흉상을 봉안하고, 2014년 10월 22일에는 영천시 임고서원에 포은 선생 흉상을, 12월 23일에는 용인시 포은아트홀에 포은 선생의 동상을 각각 봉안·제막하였다. 그는 그 외에도 2015년 10월 영천시 포은생가에 포은 선생 동상 및 영정을, 그리고 12월 13일 포은초등학교에 포은 선생 흉상을 봉안하는 등 지금까지 한중 양국에 흉상 5점, 석상 1점, 동상 4점을 봉안해 왔다. 또한 지난해 11월 16일 영일정씨 포은공파종약원과 ‘종가제례의 현황과 현실화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으며, 종가에 보관되던 가묘(家廟) 궤장본은 손상을 막기 위해, 2006년 경기도박물관에 기증, 복원 후 2011년 12월 23일 보물제1110-2호 지정되었고 전시되어 후손들의 역사관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국경을 넘는 사업가로도 충실히 살겠다는 정래정 종손은 앞으로 종손으로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정철수 선생, 그리고 한중문화교류에 기여한 포은 선생의 후손으로서 중국에서 보여 준 역사적 활약상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 일에 지금까지 해 온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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